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성공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로 여겨진다. 취업준비생이던 시절, 자기소개서에 늘 단골처럼 쓰던 문구도 '목표지향적인 사람입니다'였듯이 회사에서 찾는 인재, 사회가 원하는 구성원이 바로 저입니다! 하고 외치곤 했다.
이력서에 쓰이는 한 줄을 위해 앞을 보며 달려 나가면서 과정도 좋지만 보이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과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 괴롭진 않았지만 목표한 바를 이루고 났을 때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허무함은 피할 수 없었고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선 나름 열심히 이루었던 것들이 기억 속에서 잊히기까지 했다.
왜 그 당시에 열정적으로 얻은 것들이 쉽게 지워져 버렸을까? 란 질문으로 종종머릿속이 안개처럼 뿌옇게 휩싸였지만 또 육아와 일로 하루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저 손으로 휘휘 안개를 걷어냈다.
그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출근길에 유치원 셔틀버스를 타러 발길을 재촉하던 아이와 아빠를 봤다. 늘 그 시간 즈음 아빠가 아이를 등원시키는 것을 보면서 '저 집도 아빠가 등원 담당이구나.' 하며 슬며시 웃고는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아빠는 유치원 버스를 향해 달리는데 아이도 아빠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오더니 그 앞에 평소와 다르게 넘어져있는 돌기둥을 발견하곤 멈춰 섰다. '이게 왜 쓰러져 있지?'라는 궁금함이 물씬 풍겨져 나오는 표정과 몸짓이었다.
아빠는 아이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몸은 앞을 바라보고 달리면서 고개를 돌려, "얼른 와야지~ 버스 타야지" 하고 재촉했다. 그제야 아이는 마지못해 아빠 쪽으로 향했는데 가면서도 못내 아쉬운 지 계속 돌기둥을 쳐다봤다.아마도 아빠는 돌기둥이 넘어져 있는지도 몰랐거나 그저 걸려 넘어질 뻔한 돌부리 정도로 여기지 않았을까?
어느 날, 딸아이가 청소기를 놓는 위치가 바뀐 것을 보고는
"어? 아빠방에 있던 게 TV 방으로 왔네? 왜 옮긴 거야?"하고 물었다.난 옮겨왔는지 제대로 인지도 못했는데 아이가 직접 사용하지도 않는 물건의 변화도 잘 포착하는 것에 놀랐고, 한편으론 일상의 소소한 변화, 순간의 호기심을 무시한 채 앞만 보고 지내고 있는 건 아닐까?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넘어진 돌기둥, 바뀐 청소기 위치가 목표지향적인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득 그동안 나름 목표한 것들을 성취해오면서 달성하고 나서 예상했던 것만큼 크게 기쁘지 않았다든지, 시간이 흐르면서 이루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이 쉽게 지워진다든지 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결과만 바라보고 과정을 즐기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목표를 향해가는 여정의 작은 변화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스스로를 칭찬해주지 못하고, 하루빨리 결승선에 도달하기만을 재촉한 것은 아닐까. 정말 그랬다면 결승선에 도착했을 땐 '끝났다'란 안도감에 그곳에 도착하기까지의 수많은 감정의 물결들은 그대로 증발해서 잊혀버렸는지도 모른다.
여행이나 취미생활의 경우,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볼 것이라든지, 어떤 책을 언제까지 읽어야겠다는 등의 목표가 있음에도,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는 계획했던 것을 모두 이루었거나 혹은 그렇지 못했다 하더라도 순간순간 즐겁고 행복했던 과정을 기억한다. 오랜 시간 동안 그 감정의 생생함을 간직한다.
아빠와 유치원 등원을 하던 아이처럼, 이것저것 호기심 가득한 딸아이처럼, 그 순간에 푹 빠져 작은 것 하나에도 힐링된다며 미소를 가득 띠곤 한다.
물론 하고 싶어서 하는 것과 해야만 해서 하는 것에서 비롯한 차이점도 있겠지만 '해야만 하는 것'일지라도 이왕 하는 것이라면 스스로에게 좋은 경험으로 남겨서 배우고 느껴보는 쪽이 내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전 목표지향적인 사람입니다"보다는 "전 과정을 즐기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매일 아침, 현재 지금 이 순간이 주는 경험과 감정을 오롯이 느끼자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면서 시작한다.
앞만 보고 걷던 출근길, 이젠 하늘도 보고 풀숲에서 나는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무엇이 내는 소리일지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