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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화 May 01. 2022

[진료실 단상] 결국 단서는 환자의 '언어'에 있다.

경청에 답이 있다. 

책 <닥터스 씽킹> 중. 



   60대 초반의 까칠하고 예민해 보이는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왔다. 오른쪽 질 안쪽이 불편하고 방광염 증상도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 당시 퇴사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신환을 보지 않고 있었는데, 이 환자는 몇일 전 신환으로 와서 다른 원장 진료를 봤던 분이셨다. 그 당시에도 비슷한 증상으로 내원을 하셨다고 했다. 



  최근 피곤하고 여러 일들이 많았단다. 여성들은 외부 생식기 구조 상 면역력이 떨어지면 방광염이 쉽게 올 수 있다. 병원에 불만도 많았고, 사실 몇일 뒤면 퇴사였고, 방광염이야 뭐 항생제 주면 증상은 나아지는 터라 크게 신경쓰지 않고 항생제만 로봇처럼 처방해줘도 증상은 나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뭔가 그 환자의 불만을 들어주고 싶었고, 질 안쪽의 불편함이 젊은 시절부터 있었다며 피곤할 때마다 그 쪽이 불편하고 땡겨지는 느낌이 난다는 말이 뭔가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내진을 좀더 자세히 했다. 3주전 찍은 초음파에선 정상 소견이라고 했으니 굳이 다시 초음파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반년전 시행한 자궁경부암 검사도 정상이었단다. 옆에서 간호조무사는 간단한 방광염 환자를 뭐 이리 열심히 보나 하는 듯 뭔가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병원 직원들의 이런 분위기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난 몇일 뒤면 퇴사니깐. (이런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노력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 싸움에서 밀려나 퇴물 취급 받은지 반년 가까이 되었었다.) 



질경을 안쪽에 넣고 돌려가며 질 벽을 살폈다. 특별히 염증은 없었지만 희미하게 자궁경부cervix부터 질 벽으로 이어지는 반짝이는 scar 흔적이 보였다. 바로 환자가 불편해하는 오른쪽이었다. 추측컨데 분만 시 자궁경부의 열상이 꽤 컸던 것 같고 그걸 꼬매는 과정에서 생긴 흉터같았다. 





자연분만 하실 때 자녀분을 꽤 크게 낳으셨나요?







  환자는 마르고 작은 체형이었는데, 애는 컸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분만할 때 너무 힘들었었다고. 이 때 내 머릿속에 작은 불빛이 켜졌다. '유레카!' 안쪽 사진을 찍었고 다시 진료실에 돌아와 환자에게 안쪽을 보여드렸다. 



  이렇게 안쪽에 흉터가 있어요. 이 조직 때문에 피곤할 때 안쪽이 더 불편하신 것 같아요. 이건 어쩔수 없어요. 그냥 가져가야 하는 거에요. 그래도 원인이 뭔지 알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설명하니, 환자도 그간의 컴플레인을 멈추고 이제 납득하고 이해했다면서 알겠다고 했다. 답답한게 내려가는 느낌이라고. 아무리 진찰을 받아도 자세히 봐주는 선생님들이 없었다며 신기해했다. 간단한 방광염 처방을 받고 환자는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간혹 수차례의 소용없는 검사와 진료 끝에 환자의 정확한 진단을 내리게 되는 경우는 바로 환자 자신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고해상도 MRI scan과 여러 실험실의 눈부신 기술들이 아무리 현대 의학을 보좌한다 해도 임상 의학의 기반은 여전히 '언어'다. 우리는 환자가 의사에게 무엇이 자신을 괴롭히며, 어떤 이상을 느끼는지 이야기하고 의사는 그 것을 경청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아무리 근거중심의학과 여러 임상 알고리즘이 존재하지만, 이를 벗어나는 증상을 이야기하면 의사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헝클어진다. 이 때 대부분의 의사들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진료를 취하게 되고, 나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해답은 환자의 말에 있다. 환자의 언어를 무시한 처사는 결코 해답으로 가까워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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