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진짜 이야기 꾼은 따로 있다
나는 나를 소개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지도 않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가 불편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지 않지만, 의외로 수다스럽지 않다. 요즘은 이러한 내 모습이 무뚝뚝한 엄마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추측한다. 우리 엄마 또는 우리 가족 전체가 전형적인(?) 옛날 경상도 스타일로,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거의 '생존 신고' 정도로 간결하게 안부인사를 하곤 한다.
(전화벨)
"엄마"
"어~ 왜?"
"그냥, 잘 사나 해서"
"별일 없지. 니는 어떻노? 밥은?"
"먹었다. 나도 별일 없지 뭐."
"그래 알았다"
(뚝)
아빠와의 통화는 좀 더 다정하고 발랄한 아빠의 톤이 느껴질 뿐 전화의 시간은 더 짧으면 짧았지 시시콜콜하지 않다. 그래서 때때로 별 사소한 이야기까지 재잘대는 모녀 사이가 부럽기도 했고, 여전히 부럽기도 하다.
애교스러운, 시시콜콜한, 다정다감한 관계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인지 나는 남편에게는 매우 애교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애교가 많은 것과 수다스러운 것은 좀 다른지라 나는 듣는 역할이 더 편하다. 다행히 우리 집 수다쟁이 역할은 대부분 남편이 맡고 있고 난 그런 남편의 수다를 듣는 걸 좋아한다.
남편은 자기가 본 다큐멘터리, 책에서 읽은 내용을 알려준다. 어느 교수님처럼 지식의 깊이가 깊거나 유명 개그맨처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게 싫지 않은 건 그 속에 허세와 잘난 척 보다는 수다쟁이가 더 많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에는 갑자기 '노동절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했고, 새롭게 알게 된 거래처 사장님이 회사를 일군 얘기나 우리가 어떤 식으로 좀 더 절약을 해서 어디를 여행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계획이나 희망사항까지 주제도 다양하다. 어쩌다 '차이 나는 클래스', 'EBS창', '걸어서 세계 속으로'같은 교양 예능이나 다큐를 본 날이면 그 편에 대한 얘기도 줄줄 해준다. 얕고 넓은 지식을 라디오로 듣는 기분이랄까. 그 4D 라디오를 듣는 나는 말은 많지 않지만 리액션은 크고 많은 편이라, 남편이 말하면 맞장구 하난 기가 막히게 잘 쳐주니 이 사람은 더 신이 나서 말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가끔 의견이 달라서 부딪히거나 토론으로 대화가 진화하는 경우도 있고 술을 마신 날 폭발적인 수다는 내 단잠을 깨우기도 하니 남편의 수다가 365일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지도.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남편의 수다가 질리지 않고 반가울 때가 있는데 그건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다.
칭찬과 투정, 종류는 다양하지만 얘기를 위해서는 관심과 관찰이 필요하므로 서로가 서로를 이야기한다는 사실은 마치,
이거 봐, 네 곁엔 내가 있어
난 아직 너에게 관심이 많아
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난 의견이 달라서 싸우더라도 내 달콤한 잠을 깨우더라도 남편이 평생 내 옆에서 수다쟁이가 되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