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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Apr 10. 2021

내 삶의 체 만들기

 나는 굳이 따지자면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맥시멀리스트였다. 옷이나 액세사리, 책, 출장 다녀온 곳의 브로셔, 언젠가 받은 엽서 한 장까지 일단 내게 들어오면 대체로 소중히 모아놓았다. 하지만 쌓기만 하고 아카이빙을 하지 않으니 정작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을 찾느라 시간을 소비할 때가 종종 생겼다. 


사회 초년생 때도 그랬다. 회사 업무를 빨리 배우고, 나름의 체계를 만든다며 야근을 하다 보니 습관이 되어버렸다. 더 많이 리서치를 할수록, 더 많이 시간을 쏟고 고민할수록 좋은 작업물이 나올거라 생각했고, 저녁 늦게까지 확인 메일을 받고 퇴근해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곧 이러다가는 오래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모든 디테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번아웃 증후군이 찾아왔다. 차차 내가 모든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갔다. 오래 머리를 싸매고 있다고 결과가 더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모든 일에 똑같이 욕심을 내다보면 역설적으로 더 크고 중요한 일에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잘하겠다는 오만에서 벗어나 '우선순위'의 진정한 의미를 몸이 지치고서야 깨달았다.  


이 깨우침은 인생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에센셜리즘의"의 저자 그렉 맥커운은 말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정한다."


입사 초기에 모든 것을 잘하려다 먼저 지쳤던 모습처럼, 퇴사하고 천천히 돌아보니 인생에서 정작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달려왔던 과거의 내가 보였다. 세미나도 찾아다니고, 퇴근 후에 어학원도 다니며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또한 회사에서의 업무를 더 잘하는 수준의 노력은 아니었는지. 더 큰 범위에서 내 인생의 가치와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고, 회사나 직업을 얘기하지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생각하니 아찔할 정도로 캄캄했다. 


결국 내가 내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으니, 내가 중요하고 급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내 주변의 기대나 회사의 우선순위에 따라 정해져 온 것 같았다. 비본질적인 것에 가려져서 오래 걸리지만 사실은 중요한 일, 느리지만 내 성장을 위해 해야 하는 일, 튀지 않지만 내 옆에서 묵묵히 있어 주는 사람들이 오히려 덜 중요하고 급하지 않은 무언가로 밀려나 있었다. 


퇴사 후 갑자기 주어진 시간 속에서도 '뭐부터 하지'라며 조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건드리다 보면 시간은 직장에 있을 때보다 무섭게도 빠른 속도로 흘렀다. 


일단은 내가 지금 가진 것,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했다. 그 뒤에 내 우선순위와 가치로 만든 체에 걸러 곱게 걸러진 그것들에 내 소중한 에너지와 시간을 써야 한다. 나머지는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끝도 없이 우리의 삶에 치고 들어오는 중요한 듯 보이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비워내지 않으면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가 없으니. 필요한 것을 더하는 것보다 덜 중요한 거품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단계였다.



그런 의미로 내 방에서 나온 많은 물건이 새로운 주인을 만났고, 또는 사진으로 남겨진 뒤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 물건들에 깃든 내 추억이 본질, 물건 자체는 비본질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만의 체를 만드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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