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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Apr 10. 2021

내일이 기대되는 삶

 퇴사의 꽃은 여행이 아니던가. 

나는 태국으로 떠났다. 여행과 출장으로 20개국이 넘는 나라를 가봤지만, 태국은 의외로 방콕 스탑오버로 둘러본 게 다였기에 한 번쯤 꼭 여유롭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간 푸켓에서는 매 순간이 새로움과 자유로움의 연속이었다. 지난 여행지인 우붓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준 영적인 곳이었다면, 푸켓은 눈부신 자연과 유흥가, 소박한 로컬의 삶과 화려한 리조트가 혼재된, 적당히 들뜬 카오스의 상태였다. 조금 더 깊숙이 피피섬으로 들어갔다. 이곳 또한 파티 섬이지만, 비수기에 조용한 바닷가 숙소를 찾아 원래 섬의 매력만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업무 때문에 호텔을 파던 내공이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구나 싶었다.



소박한 오두막의 발코니로 나가자 울창한 나무 너머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졌다. 이런 바다 전망을 이 가격에 오롯이 즐길 수 있다니. 퇴사 후 휴양지 섬에 왔는데, 술 생각이 거의 나지 않았다. 기분 좋게 칵테일이나 맥주 한잔을 하는 정도 외에는 여행 내내 취할 정도로 마신 적이 없었다. 서울에서 가끔 많이 힘든 날 친구들과 그 고충을 술로 잊었다면, 이곳에서는 잊고 싶은 것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온전히 제대로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탓이었다. 


섬에 별이 내려앉은 밤, 발코니에 앉아 생각했다.


'파도 소리와 별만 있는 아름다운 이 밤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동시에 빨리 내일 아침 햇살을 만나고 싶어.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어떤 풍경을 만날 수 있을지 너무 설렌다.'


순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게 흠칫 놀랐다.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던 퇴사 직전의 일요일 밤들이 떠올랐다. 존재 여부도 잊고 있었는데, 다음날 소풍을 고대하며 잠드는 어린이의 마음 같은 감정을 만난 것 같았다. 오감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미래를 기대하는 감정의 강렬함이란. 


나는 대체로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런 내가 소중한 하루하루를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니 씁쓸했다. 지난 몇 년간 나의 삶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 안에는 지금보다 몇 배는 비싼 호텔과 화려한 레스토랑, 멋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것이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박제된 스틸컷이 화려한 삶보다 소박하더라도 생동감 넘치는 진정성 있는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싶다.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만들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피피섬에서의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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