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로이 Mar 18. 2021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판타지다.

너도 네 마음을 모르잖아요.

남사친의 연애 상담을 해주다가 말문이 막혔다.


사건은 이랬다.  한창 말싸움을 하던 중 여자 친구가 '나 집에 갈래. 연락하지 마!'를 시전 했단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일단 헤어지고 연락하지 않았더니, 그녀가 엄청나게 화가 나서 연락을 해왔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가버리고 연락도 안 해?"


말하기 싫은 것 같아서 기껏 조용히 보내줬더니 사태는 더 악화되었고, 이 상황이 이해 가지 않는 그는 내게 한탄을 늘어놓았다. 연애 경험이 많지 않은 데다 심하게 이성적인 친구에게 논리적으로 이것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연락하지 마'가 '내가 이 정도로 화가 많이 났으니, 풀릴 때까지 계속 연락해서 충분히 사과해'와 동의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관계는 끝이 났다.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우리는 가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든가 '그걸 꼭 말로 해야 해?'라고 말하곤 한다. 너무나 당연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인데 굳이 자존심 상하게, 체면 떨어지게, 우리 사이에 말을 해야 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내 친구의 경험담처럼, 관계에서 수많은 문제는 이것에서 비롯된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작은 진실은 우리 일상에서 너무도 쉽게 망각된다.


당장 자신은 오늘 점심 메뉴를 고르는 사소한 문제에도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라고 선택 장애를 토로하면서,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 기복을 가졌으면서 남에게는 지금 나의 심경을 정확히 읽고 파악해 달라는 요구는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남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기질이나 성향을 충분히 안 뒤에 그 특정한 상황에서 문맥을 파악하고서야 겨우 가능할까 싶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판타지에 가깝다고 얘기한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읽는 어려운 일을 기적적으로 해내길 바라고, 그게 틀렸을 경우에 화부터 내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일단은 말을 해야 한다.


말에 관해서 연애든 사회생활에서든 매번 깨달았던 것은 새삼스럽지만 정말로 직접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 그리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로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은 어쩌면 내 기준에 있어서의 상식이고 눈치일 수도 있다. 모두 처한 입장이 다르고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이 전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나로서는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표를 잔뜩 냈는데 그에게는 그저 원래 다정한 나란 사람의 친절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또는, 회사에서 정말 큰 불만이나 힘든 점을 꾹꾹 누르다가 상사에게 얘기했는데 상대방은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뒤에는 힘들게 얘기를 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것이 오해였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또는 내가 얘기를 했기에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와 쉽게 해결이 될 때도 있다. 설사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내가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도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거나 문제 인식의 씨앗이 되어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무언가의 시작이나 해결이 될 수 있는 중요한 행위이다.


양쪽의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소통


물론 거기에는 상호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그것이 상대방에 의해 해석되고 이해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이 곡해되거나 누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자나 메신저를 통해 전달되는 짧은 텍스트 안에서는 그 문제가 더 쉽게 벌어진다. 소통에서 언어적인 요소를 빼고 나머지 70%를 차지하는 시선, 눈빛, 표정, 손동작, 분위기 같은 비언어적 요소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중요한 일은 가능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기를 권하는 편이다. 꼭 얼굴을 보지 못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은 간결하고 명확한 단어로 담백하게, 단어와 단어 사이를 촘촘하게 설명하고, 듣는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며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고 들으려는 노력을 한다면 가능한 원래의 의도 전달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행간을 읽고 나만의 해석을 더하는 아름다운 행위는 문학 작품을 읽을 때로 잠시 미뤄두자.


말이 필요 없는 사이의 함정


매번 이렇게 말로 일일이 해야 하는지 피곤할 수도 있다. 우리는 오래 알아온 가까운 사이라 눈빛으로 통하는 사이라고 자부할 수도 있다. 운 좋게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과 오랜 시간 친밀감을 쌓다 보면 그 판타지 같던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뜻이 통함)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 사람이 당연히 알리라고 생각하고 기본적인 표현도 생략할 경우, 오히려 가까운 사이기 때문에 더욱 서운함이 쌓여갈 수도 있다.  서로에게 가장 힘을 줄 수도 있고 동시에 힘들 때 가장 위로받거나 상처 받을 수도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사실은 더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관계 속에서 불필요한 오해나 감정 낭비를 싫어하는 내게 개인적으로 사람을 볼 때 이 소통 능력은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전달만 잘해도, 남이 하는 말을 잘 들을 준비만 되어 있어도 인간관계의 많은 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부터 오늘 주변 사람에게 작은 감사나 감정 표현은 잘했는지, 본인에게 확인하지도 않은 채 누군가를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경계해본다.




참, 그래서 처음의 그 커플은 누구 잘못이냐고?

생각과 반대로 말해놓고 그것을 알아주기 기대한 여자, 자신이 잘못한 상황에서 평소 여자의 성향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이해의 노력을 게을리한 남자 모두 유죄가 아닐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통에는 두 사람의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작가의 이전글 등산보다 둘레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