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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Mar 07. 2021

등산보다 둘레길

과정은 저평가되었다.

코로나가 많은 이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꾼 2020년, 내게도 등산이라는 취미가 생겼다.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던 산을 자주 오르며 몸도 마음도 위안을 받았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할 때면 초보인 나는 종종 따라가느라 조바심이 나곤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서울의 다양한 둘레길이나 가까이는 동네에 새로 정비된 산책로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 많아졌다.


어느 날 둘레길을 걷다가 흩날리는 벚꽃에 감탄하며 한참을 서 있게 되었다. 그러다 등산보다 둘레길 산책이 더 좋았던 이유가 단순히 내가 신체적으로 힘들어서만은 아닌 것을 깨달았다. 산책은 걷는 내내 모든 걸음과 순간을 충만히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상 등반의 함정


많은 이들이 등산에 재미를 붙이고 나면 곧 '100대 명산 완등' 등의 목표를 세우고, 산의 정상에는 그 인증 사진을 위한 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목표를 향해 자기와의 싸움 끝에 정상에 도달하는 행위는 분명 건강한 성취감과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산이 정복의 대상이 되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몇 시간의 여정은 정상을 위한 지루한 과정으로 생각되기 쉽다.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만 가늠하며 오르다 보면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바위와 그 옆 풀꽃의 존재는 무시되기 십상이다. 정상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내려오는 일은 그저 등반 실패가 된다. 


하지만 둘레길은 다르다. 산을 오르는 듯하다가 주택가로 내려가고, 다시 올라가는 그 길은 등산만큼의 긴장감이나 성취감은 없을지 모르지만, 현재 풍경과 길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여유가 있다.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보니 조금 느리게 걸으며 이르게 핀 봄꽃을 감상하고, 뒤따라 올라오는 이들의 재촉에서 벗어나 새소리에 잠시 멈출 수도 있다. 언제라도 이 길에서 내려가기 쉽고, 오늘 목표했던 거리를 다 걷지 못해도 다음에 이어서 걸을 수 있다는 점도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의 치열함 속에 예외적으로 주어지는 관대함처럼 느껴진다.  


특별함을 만드는 것은 과정


나 또한 정상의 함정에 빠졌었다. 업무를 할 때도 등산의 정상에 해당하는 최종 결과물만 중요하게 여겼다. 일의 과정에서 받은 영감과 통찰, 내 생각을 담은 메모와 초안은 어딘가에 처박혔고, 그것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만 소중하게 여겼다. 결과물이 나오기도 전에 시작 단계부터 떠드는 이들을, 과정을 꼼꼼히 적고 공유까지 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은연중에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오지 못하면 어쩌려고 저렇게 떠들지?'라며 과정은 그저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한 것일 뿐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사족이지만 초라한 시작이나 날것의 미완성된 생각과 글을 남기는 것이 두려워 브런치를 시작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정말 중요한 것은 남들과 비슷한 그럴싸한 결과물보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어떤 노력을 했고, 무엇을 느껴 현재가 만들어졌는지 같은 것들이다. 같은 결과물과 똑같은 점수라도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모두가 다르다. 그리고 성장과 다음의 발걸음은 거기에서 달라진다. 우리가 누군가를 채용하거나 특정 브랜드에 끌리는 이유도 비슷비슷한 스펙보다는 사실 이런 과정이 만들어낸 특유의 스토리와 철학이지 않은가.  


작은 걸음과 과정이 더 주목받는 사회


정상에 오르는 순간은 찰나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그것보다 훨씬 더 긴 지나온 길의 아름다움을 하나도 보지 못하거나,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고 그 과정과 노력이 부정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육아 전문가 오은영 박사 또한 '아이들 인생에서 나중에도 기억나는 것은 한 번의 시험 점수가 아닌, 잠을 이겨내고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라 말했다.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을 때, 결과가 어떻든 만족할 수 있고 최선을 다한 내가 자랑스러울 수 있다. 결과에 실망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과정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지 모른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정말 중요한 것은 과정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인스타의 멋진 비키니 사진 뒤에는 치열한 다이어트와 운동의 시간이 쌓여있음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성공한 이들의 뒤에는 얼마나 많은 실패와 노력이 켜켜이 쌓여있는지를 말이다. 정상에 다다른 멋진 하이라이트 신보다 그 뒤에 얼마나 길고 힘든 비하인드 신이 있었는지 그 노력과 과정이 더욱 회자되는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산과 길을 완주했는지보다 그 길에서 무엇을 봤고 느꼈는지, 그 아름다움에 관해 묻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오늘도 여유롭게 계절의 변화를 만끽할 수 있는 산책을 나서며 모든 위대함의 처음에는 미숙한 한걸음이 있음을 상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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