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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Dec 31. 2018

가짜가 유행하는 세상

#인스타감성

아인슈페너를 처음으로 먹어본 것은 상수동 근처에 살았을 때였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와 함께 밤새 집에서 수다를 떨고 아침에 퉁퉁 부은 얼굴로 평소에 자주 지나쳤지만 들어가보지는 않았던 집앞의 작은 카페에 들어갔던 것은 앞에 써있는 글귀가 새삼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대가 머물다 간 

이 곳, 이 시간이 

무료하게 흘러가는 

그대의 삶이 

고단하게 느껴질 때 

조그마한 마음의

위로가 되기를


카페의 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주말과 공휴일에는 노트북 사용을 금지합니다. 좋은 사람과의 대화가 중요합니다' 카페 오너의 운영마인드가 한 눈에 보이는 글이었다. 이 작은 카페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나는 아인슈페너라는 메뉴를 처음으로 보았는데, 친절한 직원분께서 비엔나 커피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라며 설명 해 주셨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으로 주문 해 본 것이다. 비엔나를 여행했을 때 동행인 동생과 함께 작은 예술가 카페에서 비엔나커피를 시켜마시며 일렉트로니카와 락에 대해 몇시간이고 뜨겁게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쫀득해보이는 생크림이 담긴 아인슈페너는 정말 맛있었다. 차갑고 탱글한 크림을 한모금 입에 담고 컵을 당겨 들이키면 고소하고 진한 에스프레소가 나와 섞이는 맛은 비엔나에서 먹어본 그 맛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에스프레소 어떻게 추출한거지? 어떤 원두 쓰는거지? 한국에서 먹어본 그 어떤 에스프레소와도 달랐던 그 카페의 커피는, 나만 제외한 상수동 주민들이 모두 알고 있던 유명 맛집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더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고싶다며 연희동으로 이사한 후, 상수동에 꾸려놓은 단골카페와 아지트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나는 앞으로 주말동안 나의 시간들을 책임질 카페를 찾기 위해서 열심히 동네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나같이 비슷한 인테리어에 심하게 북적이는 것이 내 취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음악이 마음에 들면 자리가 너무나 불편하거나, 자리가 편하면 커피가 맛이 없거나 음악이 끔찍했다. 이렇게 여러 곳을 헤매이던 도중, 아인슈페너로 유명하다고 알려진 카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주일에 꼭 한번, 자리가 없으면 테이크아웃을 하더라도 (아인슈페너는 종이컵에 담으면 맛이 떨어진다) 마셔주었던 아인슈페너를 이사한 후에도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들떠 있었다. 간단하게 읽을 수 있을만한 얇은 책과 함께 기대에 부풀어 의자에 앉았다. 유행하는 빈티지 스타일로 멋지게 꾸며져 있는 카페 내부는 역시 북적이는 손님들로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빙빙 돌아다니며 작은 내부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카페이긴 한가보네. 어쩔 수 없지. 정신없는 기분에 책으로 시선을 고정한 지 20여분, 오랜 기다림 끝에 예쁜 잔에 담겨나온 아인슈페너를 마시게 되었다. 

컵의 손잡이를 잡자마자 끈적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넘쳐나온 커피와 크림 때문이다. 참고 마시려고 했지만 상태가 엉망이었다. 소서는 이미 넘친 커피와 크림으로 흥건해져 있었고, 잔을 들때마다 커피가 뚝뚝 떨어져 마실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바지에 커피방울 자국을 남기고서야 카운터로 가서 컵에 넘친 것들을 닦아달라고 이야기 했고, 직원은 나를 이상한 사람을 본다는 듯 보며 말했다. '저희는 원래 비쥬얼을 위해서 아인슈페너 넘치게 담아드려요.' 비쥬얼이요? 나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테이블의 다른 손님들을 둘러봤다. 그 중 커피를 마시고 있는 손님은 없었다. 전부 뭔가에 홀린듯 계속해서 사진만을 찍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사진을 찍고 나간 손님의 테이블에는 음료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순간 나는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가 된 기분이 들었다. 왠지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커피를 마시러 온 카페가 순식간에 스튜디오로 바뀌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빨리 사진찍고 나가. 웨이팅 많아.' 직원이 시선이 꼭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끝내 나는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그냥 그 카페를 나왔다. 한모금 맛본 아인슈페너의 크림은 그냥 그랬고, 에스프레소는 썼다.


나에겐 카페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가 일하는 카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내 아지트였다. 자리도 편하고 사람도 많지 않으며 분위기 좋은 이 카페의 커피는 정말 맛있었기 때문에 한상 단골로 보이는 똑같은 손님이 앉아있곤 했다. 단골손님들은 서로 친해지기도 했고, 간혹 친구가 상대를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이 친구는 최근 공부를 하기 위해 카페를 그만두고,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연남동에 새로 생긴 한 카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카페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것들이 없는 이상한 카페라고 했다. 거품기, 바닐라빈 등등.. 이 친구는 도대체 이 카페가 어떻게 경영되는건지 궁금해 했고, 끝내 사장님의 경영이념을 듣게된다. 'ㅇㅇ씨, 우리 카페에는 사람들이 커피마시러 오는게 아니라 사진 찍으러 오는거예요. 커피가 꼭 맛있을 필요는 없어요.' 


친구는 그 말을 듣고 적잖이 당황한 듯 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나도 뒷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동네에 우후죽순 생기는 카페는 많은데, 왜 내가 자주 가고싶은 카페가 없는걸까 에 대한 답이 나온것이다. 가짜가 유행하는 세상이다. 정사각형 반듯한 인스타그램 피드에 커피의 맛은 공유되지 않는다. 플레이리스트도 공유되지 않는다. 예쁜 인테리어와 예쁜 커피잔, 비쥬얼, 필름카메라의 분위기를 낸 가짜 필터만 공유될 뿐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가짜 일상의 한 부분이 모이고 모여 실재하는 가짜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것이 괴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뿐일까? 한껏 멋낸 사람들로 북적이다, 서서히 발걸음이 끊기고, 건물은 다른 간판으로 순식간에 바뀌고 만다. 어쩐지 모르게 입맛이 씁쓰름 해 진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내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는건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앞으로 내 마음에 드는 곳은 점점 찾기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은 나의 개인적인 호불호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흘러갈 것이다. 상수동 카페의 문구가 문득 그리워졌다. 


'좋은 사람과의 대화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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