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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Apr 08. 2020

고통은 성장의 동력원이 아니다

긍정 강요의 폭력성

몇달 전인가, 주변 사람들이 잘 맞춘다며 떠들었던 신점을 재미로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빨갛고 파랗고 노란 요란한 색의 방석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무당은 나에게 '어린 애가 왜이렇게 가슴에 맺힌게 많아' 하고 툭 내던졌다. 보통 고민이 많은 사람들이 신점을 보러 올 것임은 당연하므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느이 집에 감나무 있지?' 식의 화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어째서인지 그동안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차례대로 되짚어 보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 하루 내 인격을 말살시켰던 전 직장의 사람들, 우울증에 시달리던 나에게 "게을러서 그런거에나 걸린다" 며 독설을 내뿜던 사람. 화나게 했다는 이유로 나를 폭행했던 아빠. 사소한 것에 날선 반응을 보여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던 엄마. 폭행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던 나에게 다시 폭행을 가했던 언니,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진 것 처럼 느껴졌을 지 몰라도 내 안 어느 구석에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그 고통으로 인해 어떤 것들을 겪어내야 했는지 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그 사람들이 왜 나에게 그런 고통을 주었어야 했는지 궁금해서 나는 한때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왜 그랬었는지 물어보았다. 나의 고통이 내 안 어느 구석에 남아있는 것 처럼, 그들 또한 마음 한켠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를 내심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는 죄책감 같은것은 없었다. 그들은 '네가 나를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에' , '네가 너무 게을렀기 때문에' , '네가 똑바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라며 모든 일의 원인을 내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나는 정말 내가 이상한 사람인줄만 알고 있었다. 내가 이상하게 사람들의 화를 돋구고, 내가 이상하게 게으르고, 내가 이상하게 모든 일에 서툴러서 고통받을만한 사람이라고, 그들 모두가 그렇게 이야기 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고통을 힘겹게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왔던 내가 다시 과거를 돌아봤을때, 거기에 나의 잘못은 보이지 않았다. 화가 난다고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었던 것이고, 어떤 사람은 본인의 정신병 때문에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것 뿐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날선 분위기에 의기소침해져 있었을 뿐이며, 사실은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무슨 일이든 부지런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철면피의 가해자들 때문에 더이상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나를 대했던 태도는 아주 부당하고 잘못되었다. 나는 그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다. 나는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마땅한 인격체이고, 내가 그 어떤 실수를 한다고 해도 나를 향한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후에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이 또 한가지 있다. 나의 고통을 들었을때 '그 고통으로 인해서 너는 성장한거야, 그러니까 너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해야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은 나의 성장을 바랐던 것도 아니며, 고통 자체는 나에게 상처만을 가져다 주었을 뿐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고통을 준 사람들을 용서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강요하곤 했다. 사랑과 용서, 그리고 성장. 이 세 단어의 조합은 썩 그럴싸 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고통받았던 때의 꿈을 꾼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 이유없이 불안할때 예전의 기억들이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가해자들이 나에게 준 고통은 내 삶에 있어서 무시못할 걸림돌이 되었으며, 나는 아마 평생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결코 고통이나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로 인해 성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질 뻔 했다.


이 핀트 나간 긍정주의자들이 항상 비유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상처입은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는 비유이다. 대충 들으면 감동적이고 그럴듯한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폭력적인 시선이 아닌가? 조개는 상처입고 싶지도 않고 진주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주의 아름다움 따위는 조개가 알 바 아니지 않은가? 그건 사람들이 만든 가치일 뿐, 조개에게는 몸 속에 아프게 박혀있는 커다란 이물질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장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덕이다. 나는 내 힘으로 상담을 받았고, 내 힘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또 고통을 힘겹게 견디는 나에게 사랑과 지지를 보내준 사람들의 덕이다. 나는 나의 노력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다시 일어나 성장할 수 있었지, 결코 고통 자체와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 덕분에 성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제발 나에게 이 핀트나간 긍정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허울 좋고 따뜻한 말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폭력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과 용서를 전하는 말을 하지만 사실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도, 공감할 생각도 없는게 아닐까? 고통은 성장의 동력원이 아니다. 나는 아직도 그때 내가 고통받지 않았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고통은 피할 수록 좋고, 사랑과 지지는 많이 받을 수록 좋다는게 오랜 세월 고통을 이겨내려고 노력했던 나의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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