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스로도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
힘든 일이 있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오히려 친한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거나 의지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내가 그랬다.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는 내가 독립한 '사실'만을 알리고, 나는 되도록이면 만남을 자제하며 계속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힘들고 우울할수록 누군가를 만나야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누군가와 연락을 하고 만날 힘이나 의지 자체가 없었다. 하루종일 누워 넷플릭스로 영화를 봤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잠을 잤다. 그것도 아닐 때에는 대부분 담배를 피웠다.
그렇다고 혼자 있고 싶었던거냐고 한다면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너무나도 외로웠고, 무서웠고, 주위에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지만 그런 상태를 난생 처음 겪어봤기 때문에 나와 친한 친구들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까닭이다. 친했던 친구들을 밀어냄과 동시에 나에게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갈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나를 구원해 줄 어떤 사람이었다.
내가 바랬던 구체적인 구원자의 요건은 이러했다.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나를 안정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 어떤 상황에도 나를 꾸짖거나 비판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 나의 결핍을 잠재워 줄 수 있는 따뜻하고 다정하고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울 때를 제외하고는 집 밖에도 나가기 싫어하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 생길 일은 만무했다. 단지 내가 자주 갔던 곳이 한 군데 있었는데, 그곳은 친구가 매니저로 일하는 조그마한 카페였다. 반지하에 있는 주제에 간판도 너무 작게 달아놔서 그냥 걸어가는 행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발견 할 수 없는 그 카페는 커피 하나만큼은 끝장나게 잘 만들어 언제나 단골로 붐볐다. 카페 특유의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도 좋았지만 탁월한 플레이리스트 선정과 친구 특유의 느긋하고 온화한 분위기도 단골 유치에 한 몫 했던 것 같다.
나는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갑자기 깊은 물에 잠겨버릴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힐때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친구의 카페로 피신하듯 달려가곤 했는데, 노트북 하나를 가지고 글을 쓰는 둥 마는 둥 하는 나에게 친구는 언제고 커피를 무한으로 리필해주었다. 그리고 휴식 시간마다 짬짬히 나와 함께 담배를 태워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는 나에게 카페의 단골손님을 소개시켜준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며 처음 대화를 튼 그 사람은 날렵한 체형에 큰 키를 한 폴란드계 미국인이었다. 동아시아 정치 전공으로 잠시 유학을 와 있었던 그 애와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고, 친구는 잠깐 말을 얼버무리며 일을 하러 가야겠다고 빠졌다.
카페 일이 끝난 친구의 강요로 셋이서 뜬금없이 노래방에 함께 가고 술을 마신 이후로 그 애는 나에게 퍽 다정하게 굴었다. 친구를 빼어놓고(미안) 둘만 만나는 횟수가 늘어갔고, 그 애는 한 낮에 우리 집에서 우울해하는 나에게 음악을 틀어주고 초코무스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됐다. 휘핑크림을 만들며 허밍을 하면서 엉덩이를 이 쪽 저 쪽으로 흔드는 그 애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혹시 저 애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 사는 곳이 가까워 연락을 하는 횟수보다 만나는 횟수가 더 잦았다. 그렇게 매일같이 함께 시간을 보내다 연인이 된 후에도 그 애는 나에게 다정했다. 언제든지 내 말을 경청해주고 나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었다. 내가 원하는 구원자의 조건이 충족되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안정되지 못했다. 그 애와 같이 있는 순간에는 모든 게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다시 혼자 있는 새벽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안좋은 생각을 했다. 그 애를 많이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겪었던 일을 얘기할 수도 없었고, 진심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그 애가 나를 떠날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에 떨기도 했다. 실망스러운 일이 하나 생기면 과민반응했고, 그 이후에는 갑자기 냉정해지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점점 지쳐갔다. 말하자면 사랑은 나를 구원하는데에 실패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