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주기적으로 상담을 받고 심리 서적을 읽으며 매일 마음을 굳히는 나날을 보냈다. 취성패학원에 등록해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배우고, 집 앞 카페에서 글을 쓰는 일상을 반복했다. 가만히 있으면 온갖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5년 전 10년 전의 일들도 떠올라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녹초가 되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2평 남짓 되는 방에는 창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집 앞에 있는 카페를 방문 드나들 듯 했다.
평일에 사람이 별로 없는 카페에 혼자 앉아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다보니 카페 사장님과도 친해지게 됐다. 나를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에는 나를 따라다니는 나쁜 기억에서 잠시 해방되어 새로운 세상에 나를 내놓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게 따뜻한 라떼와 함께라면 더할나위 없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생활 루틴을 찾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길어져서 체력이 많이 안좋아졌고, 조그만 일에도 쉽게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학교나 직장에 나가 조용한 한낮의 시간대에 나는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면서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모아놓은 돈이 생활비로 거의 다 떨어져갔기 때문이다. 독립을 한 후에는 생활비가 생각보다 더 많이 나갔다. 거의 아무것도 사지 않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는데도 숨을 쉴 때마다 돈이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매달 35만원 가까이 되는 하우스쉐어비를 내고 상담비도 내야했기 때문에 금새 쪼들리기 시작했다.
나같은 경우는 경력이 있던 직종에서 계속 종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준비에 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시 내가 앞으로 뭘 해야하는지, 뭘 하고싶은지, 뭘 잘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그즈음에는 매일같이 악몽아닌 악몽에 시달렸는데, 막 수능을 마친 고3으로 돌아가 미래준비가 아무것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 뭘 해야할지 무작정 고민하는 꿈에 식은땀 범벅이 돼서 깨어나곤했다. 집을 나오기 전 까지는 무작정 '글을 쓰는 일을 하고싶다' 라고 생각했지만, 생각과 현실은 영 딴 판이었다. 컨텐츠에 관련된 무수히 많은 직종이 있었고, 필요로 하는 포지션도 너무나 다양했다. 에디터를 구하는 회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렇듯 다시 사회초년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내던 때였다. 어떤 방송에서 초등학생이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되고싶냐는 말에 '훌륭한 사람이 될거예요' 라고 대답하자, 어떤 연예인이 '뭘 휼륭한 사람이 돼? 하고싶은대로 그냥 아무나 돼.' 라고 하는 말이 어쩐지 가슴 깊이 박혔다. 초등학생 때였나, 숙제를 하지 않고 놀다 들어온 나에게 '그래서 앞으로 무슨 일 해서 먹고 살래? 돈 잘벌려면 공부해야지.' 라고 하는 엄마의 말에 충격을 받아 펑펑 울어 엄마를 당황시켰던 적이 있다. 한창 꿈도 많고 가능성도 많은 나이인 나에게 그 말은 '너는 평생동안 돈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고 지금은 그걸 위한 예행연습을 하고있는거란다~' 라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고싶은대로 그냥 아무나 돼' 같은 말을 해준 어른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항상 뭔가 '멋진 일',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일' 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일을 했던 지난 2년동안 나는 아주 천천히 말라 죽어가듯했다. 반짝거림도, 꿈도, 패기도 잃었고, 더이상 내가 무엇을 좋아했었는지, 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말라붙은 파뿌리같이 시들시들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하고싶은대로 아무나 되자' 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이 곳 저 곳에 이력서를 뿌렸다. 그러자 돌덩이가 얹힌듯 했던 내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멋있는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나는 착한 딸이 될 필요가 없다. 나는 남들의 기준에 맞춰서 살 필요가 없다. 이 생각은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준 시발점이 되었다.
'자유' 는 스스로 자, 따를 유를 써서 '자유' 라고 한다. 그러니 자유라는것은 곧 자신을 믿고 내가 가고싶은 길을 찾아간다는 의미인 것이다. 자유를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유념해야할 일이 있다고 한다. 바로 굶어죽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될까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굶어죽지 않고, 생각보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되는것은 힘들다. 자유를 찾아 나서기 전 느끼는 불안은 현실에 근거하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걱정같은 환상에서 비롯된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는 여기를 그만두면 굶어죽을 것 같지만 일단 그만두고 나면 회사 안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것처럼. 하지만 일단 일어나서 내 길을 걸어가면 다른 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부모님의 기대를 정면으로 깨부셨을때 비로소 내가 오랜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취업을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무엇이든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하는 법이다. 나에게 가장 편안했던 세계는 바로 부모님의 세계였다. 내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나는 그 세계에서 안주했고 아직 어린아이인 채로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온통 뒤흔든 강렬한 충격으로 기존의 세계가 깨진 후에야 비로소 나는 날아갈 수 있었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