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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Oct 25. 2017

생각보다 초라한 시작

돈 없고 직장 없는 20대 중반의 독립 실행기

생각보다 초라한 시작


새 집 계약을 마치고, 커뮤니티에서 추천한 이삿짐센터를 댓글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이사 날짜를 잡았다. 덤덤히 내 물건을 싸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그래도 내가 설마 진짜로 집을 나갈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지 당황을 하셨다. 


하지만 부모님이나 나나 먼저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분위기에서, 아빠는 나에게 와 "돈 모아서 시집가야지"라는 무의미한 설득을 했지만 "지금 아빠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며 대화를 차단했다. 


결국 내 결심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엄마는 서운한 마음에 나갈 때 방 안에 있는 가구들은 건드리지 말고 새로 사서 나가라며 쏘아댔고, 아빠는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모아둔 돈을 가지고 나가 '낭비' 하는 게 싫었는지 내 통장에 있는 돈에서 본인이 투자한 등록금을 빼라고 했다. 엄마는 듣다못해 아빠와 맞서 싸웠고,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나는 덤덤히 꼭 필요한 물건들을 깨지지 않게 꽁꽁 쌌다.


다음 날, 이삿짐 트럭이 왔을 때 엄마는 너무 많이 울며 나를 보냈다. 그동안 나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운한 마음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고. 필요한 게 있다면 전부 가져가라고 했다. 


부모님과 같이 살며 집 나가라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던 것 같은데, 엄마도 나도 지긋지긋하게 서로 너무 많은 상처를 줬는데, 엄마는 아직도 나를 붙잡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나에게 폭력을 휘둘러버린 아빠보다 내 편이 되어주지 않고 방관했던 엄마가 더 미웠다. 엄마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집을 나가는 이유는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세상 어느 곳 보다도 안전하고 아늑하게 느껴져야 할 내 방, 내 공간에서 나는 그때의 공포와 수치심, 배신감을 계속해서 곱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 나를 치유하고 싶었다. 이삿짐 아저씨는 이사 트럭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나를 보며 상수동으로 가는 내내 나를 위로해줬다. 


새로운 집에서 하우스 호스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이삿날이라 도와주려고 회사 반차를 쓰고 나왔다고 했다. 이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 있다니.. 쏟아내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러나 그 선심이 무색하게끔 내가 가지고 온 짐은 별게 없었다. 싱글 침대, 화장대, 옷 박스 두어 개, 조악한 주방용품과 욕실용품을 합쳐 1박스. 잡 물건을 담은 1 박스. 그리고 이삿짐센터 아저씨를 가장 힘들게 했던 책을 가득 담은 몇 바구니..


너무 좋은 이삿짐 아저씨와 하우스 호스트 덕분에 내 이사는 1시간 만에 끝나버렸고, 옷과 물건들을 대충 정리한 후 나는 침대에 뻗어버렸다. 꽃아 둘 책꽂이가 없어 방 모서리에 삐뚤빼뚤 마구 쌓아 올려진 책을 보면서 잠시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다음 순간에는 갑자기 기분이 상쾌해졌다. 


뭐야, 독립 별거 아니잖아.


내 방은 3.5평가량의 아주 작은 방이었다. 해도 들지 않았을 뿐더러 너무 좁아 침대와 행거만으로 가득 차 버릴 정도였다. 사람이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지 조금 쾨쾨한 냄새가 났는데, 내가 들어오기 전 하우스 호스트가 놓은 디퓨저 덕분에 그나마 냄새가 가려졌다.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희망찬 다짐과는 달리 나는 낮과 밤의 구분이 어려운 방에서 하루 종일 잠을 자고 영화를 봤다.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해 밤마다 답답해서 창문을 열어놓고 숨을 몰아쉬기를 반복했다.


불을 켜면 다리가 무수히 많이 달린 지네들이 벽에 걸어놓은 캘린더 뒤로 샤샤샥 하며 숨는 것이 보였다. 벌레를 질색하며 싫어했던 나도, 막상 이런 환경에 노출되자 별다른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사실은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얕은 우울증이 점점 더 커져 나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거기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담배를 아주 많이, 많이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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