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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Jun 07. 2020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 남기

뉴저지에서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저번에도 말한 적 있지만 나는 그래도 (미국 입장에서 봤을 ) 외국인인 인턴 중에서 운이 좋았던 편이었다. 실제로 직접 들은 얘기들과 인터넷 후기를 보면, 꽤 많이들 ‘그냥 한국 회사에 잡일 하러 온 건데 배경이 미국이에요’라고 말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한국사람들만 있는 회사에서, 막상 와 보니 영어를 쓰기는커녕 전공과 관련된 업무는 하나도 주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니 지금은 좀 상황이 더 괜찮아졌길 바라본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유학을 하거나 아예 미국에서 나고 자라서 직접 미국 회사들에 지원하지 않는 한 전공과 관련된 직종의 ‘제대로 된’ 미국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인턴에게 급여를 주지 않더라도 일을 하겠다는 원어민(미국인), 혹은 원어민 뺨치는 영어 실력을 가진 지원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이었고, 그 마당에 굳이 임금을 주고 비자를 서포트해주면서까지 한국 사람을 뽑을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J1 비자로 ‘미국’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래도 흔치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래도 애초에 인터뷰를 볼 때부터 디자이너가 꼭 필요하다는 회사의 어필(?) 이 있었고,  ‘클로이 씨 여기 오면 영어 많이 늘 거예요. 여기 오면 영어 쓸 일이 많을 거예요’ 하고 회사 쪽에서 오히려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내 영어 실력을 확인한답시고 영어 인터뷰도 진행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회사에 대한 신뢰감이 있었다. 그래서 직무와 영어에 대한 부분은 별 걱정 없는 채로 배우는 자의 마음을 캐리어에 넣어 왔었다.


그런 저런 기대와 각오 같은 것을 하고 회사에 출근을 해 보니, 그렇게 회사 쪽에서 영어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를 많이 쓴다’는 게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또래 직원들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나온 연예 기사들을 영어로 번역해서 내보내는 에디터들이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교포였던 것이다. 한국말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충 한국말을 알아는 듣는 듯했다 (우리로 따지면 리스닝은 되는데 스피킹이 안 되는 형편이랑 같은 것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다른 직원들이 그 친구들에게 한국말로 말을 걸면 그 친구들은 영어로 대답을 하는 식이었다. 뭐랄까, 왜, 한때 한국 드라마에서 볼 수 있던 장면 아닌가?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얘기하면 외국 배우들이 영어로 대답하는. 그때는 아니 저게 뭐야-라고 생각했는데 그 드라마 속에 내가 들어앉은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콘셉트를 잘 잡는 것이 중요했다. 어정쩡하더라도 영어로 밀고 갈 것이냐, 아니면 한국어로 편하게 갈 것이냐. 물론 한국어를 20퍼센트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아예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뭔가 애초에 마음을 잡지 않으면 흐지부지 한국말만 하고 영어는 단어 옹알이만 하다 끝날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어설프더라도 웬만하면 영어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한 가지 또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아무리 바로 옆자리에 있어도 웬만하면 대화를 메신저로 한다는 사실이었다. 입을 써서 영어로 말을 할 기회는 별로 없던 것이다. 물론 오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하고 내가 쓰는 말이 말이 되는 말인지 답장을 하는 데 엄청난 심사숙고의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스피킹이 늘고 싶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운이 좋은 케이스인 건지 뭔지, 사실상 디자이너는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서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말을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직원들이랑 영어를 쓸 일이라면 굿모닝, 혹은 그저 짧은 안부 인사 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사장님이랑 영어로 의견을 나누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스피킹’이 아니라 ‘라이팅’이었다.


숨겨진 복병은 또 있었다. 회사 내에 그래픽 디자이너는 나 혼자뿐인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한 1년 동안은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인터넷에 디자인 자료는 아주 무궁무진했고, 어쨌든 노래 없이 못 사는 내가 미국에 와서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케이팝에 관련된 디자인물을 제작하는 것이 꽤 흥미롭고 신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포토샵은 ‘매직’이잖아. 뭐든 다 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이것 좀 해줘 봐.”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있었고, 한류 관련된 상품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던 만큼 다른 경쟁사 웹사이트에서 내 디자인을 무단 도용하는 일이 꽤 자주 있었는데도, 거기에 대해 분노를 하는 것은 왠지 나뿐인 것 같았다. 소송을 걸 수도 있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이 들기도 하고, ‘그럼 우리도 베끼면 돼’ 하고 타사에서 제작한 디자인을 가져와서 그대로 만들으라는 식도 있었다.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과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윗선’에서 ‘무슨 일 있으면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냥 해봐’ 하면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또 간혹 디자인이 어딘가 그들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그들은 ‘글쎄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아. 아무튼 한 번 가지고 놀아 봐’ 하는 식이어서 혼자서 끙끙대야만 했던 적이 많았다.


신분 문제도 한 건 했다. J1은 직종에 따라 1년보다도 더 오랜 기간 동안 머물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나는 오직 1년밖에 머무를 수 없었다. 입사 초기에는 이것만으로도 감사했고, 오자마자부터 H1B 비자(취업비자)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회사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몰랐기 때문에 우선은 J1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고, 이런저런 불만도 있었지만 미국 생활에 나름 만족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흘러가는 1분 1초가 아깝게만 느껴졌었다. 회사에서 맨 처음 인터뷰를 했을 때는 1년간 인턴 생활을 하다가 내가 일을 잘한다 싶으면 취업 비자를 스폰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 때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그래서 회사의 입장이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나는 일단 이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신분 문제가 아주 아주 중요한 것이어서, 나는 잘 지내다가도 이따금씩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 보내면서 회사 내 샵 매출이 내가 입사 하기 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는 소식을 보고 듣게 되었다. 물론 나 혼자 잘해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디자인들이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 아니겠는가. 회사 분위기는 점점 더 좋아졌고 이제 곧 어쩐지 회사로부터 즐거운 제안을 듣게 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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