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만들어 둔 수많은 약속들이 가는 곳은 어딜까
다른 별이 있기라도 한 걸까?
우리는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과 정말 많은 약속들을 한다. 개중에 지켜지는 약속보다는 애초에 안 지켜질 약속이었거나 지켜지지 못한 약속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내가 아직도 강력하게 기억하는 애초에 지켜지지 않을 작정으로 만들어졌던 약속들 중에 하나는, 내가 여덟 살 때 엄마가 주었던 약속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햄스터를 키우게 해 줄게.”
당시 햄스터든 병아리든 토끼든 안 키우는 친구가 없는 데다가 학교가 끝날 즈음에는 거의 매일 무슨무슨 장수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학교 앞에 와서 그 귀여운 동물들로 우리를 아주 많이 유혹했던 때였다. 우리 엄마는 당시만 해도 동물은 정말 질색 팔색 하는 분이었고, 그나마 허용되는 건 짖거나 소리를 낼 수 없고, 집안을 어지를 수 없고, 사후 처리가 그나마 용이한(?) 물고기가 전부였다. 동생도 아빠도 나도 다 동물을 좋아하는데 왜 어째서 엄마 한 사람 때문에 동물을 키울 수 없는 건지. 더군다나 어떻게 저렇게 작고 귀여운 햄스터를, 어떤 모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싫어하고 거부할 수 있는 건지, 나의 어린 마음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더랬다. 아마도 엄마는 자꾸만 떼를 쓰는 나의 입을 막을 방법을 모색한 끝에, 고학년 때까지 기다리면 햄스터를 사주겠다고, 지금은 네가 너무 어려서 햄스터를 돌보기 어려우니 그때까지 기다리면 키우게 해 주겠다며 약속처럼 보였던 그 문장들을 나에게 건네셨던 모양이다. 나는 고학년이라는 말이 그래서 도대체 언제냐면서, 4학년부터 고학년인 거냐고, 그럼 4학년이 되면 꼭 사주는 거라고 약속에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정말 몇 년 동안 더 이상 보채지 않고 순진하게 3년을 더 참으며 기다렸다.
4학년이 되자마자 나는 엄마에게 “이제 햄스터 사주는 거야? 고학년 되면 사 준다고 했잖아. 드디어 햄스터 키워도 되는 거야?” 하고 물었고, 엄마는 그 약속을 이미 오래 전에 기억 저 너머에 던져버린 듯했다. “내가 언제 키워도 된다고 했니? 나는 그런 적 없다.” 세상에. 나를 3년을 기다리게 해 놓고 그런 적이 없다고? 기억이 안 난다고? 여하튼 모르겠고, 햄스터는 냄새나고 밤에 시끄러워서 절대 안 된다는 말만 돌아왔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싶었으나, 얼마 후에 친구들로부터 누구네 햄스터는 자기들끼리 잡아먹었대- 하는 소리를 듣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방가방가 우리 친구 햄토리, 어디든지 달려가요 햄토리, 만화 햄토리로만 햄스터를 귀여워했다. 그때 엄마가 나에게 했던 그 약속은 어디로, 어디로 가 버렸을까? 그러려고 태어난 약속은 아니었을 텐데. 기억 안 난다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아 길을 잃었을까? 아니면 엄마로부터 상처를 받고 트라우마라는 허물을 나에게 던져놓고 사라진 걸까?
부모 자식 관계 말고도 우리는 절대 멀어질 것 같지 않던,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친구나 연인과 갑자기, 혹은 서서히 멀어지게 되는 일도 경험한다. 지금 나처럼 갑자기 타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거나, 아니면 무언가가 트리거가 되어서 9년 지기 10년 지기 절친했던 사이를 단 한순간에 끊게 되거나. “우리 나중에 아이 낳으면 유모차 끌고 같이 놀러 다니자,” “우리 할머니 되어서도 지금처럼 친하게 지내자.” 분명히 그 당시에는 어떤 약속들만큼이나 선명했던 약속들이었는데 어떤 사건이나 시간에 먹혀버린 그 약속들은? 이전 연인들과 연애할 때, 꼭 결혼할 것처럼 했던 그 수많은 약속들은? 개중에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다가갔던 약속들과, 나에게 벌써부터 지켜지지 않을 것이 확연히 보였던 그 약속들은? 남산의 그 수많은 연인들의 자물쇠들 중, 정말 지켜진 약속들은 몇이나 될까?
우리는 또 우리 자신과 얼마나 많은 약속을 해 왔나? 내일부터는 운동을 할 거야, 다음 달부터는 미라클 모닝을 할 거야. 나는 이게 될 거야, 저게 될 거야.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남들에게 했던 약속들보다 우리 자신에게 했던 약속들을 더 많이 버리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에게 약속을 하면, 지키지 않는다고 한들 어차피 상처를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자신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쉽게 약속하고 쉽게 잊어버리거나 그 약속들을 깨 버린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누구나 아는 말이라는 것은 아주아주 오랜 역사 동안 - 아마도 인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우리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얼마나 많이 잊혀져 왔는지, 그게 얼마나 흔한 일인지를 방증하는 것일 테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탓하고 벌하자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냥 단지, 어느 날 갑자기 궁금했다. 이 많고 많은 약속들이, 온 인류가 이 작은 지구라는 별에서 살아오면서 해 왔던, 지켜지지 못한 수많은 약속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들 지내고 있는 걸까? 가끔은 잊어버리려고 했던 그 약속들을 다시 지켜보려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분명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닐 것 같은데. 지켜지지 못한 약속들은 잠시 떠돌다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그들만의 별로 이동하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가볍고 무거운 약속들이 이 지구에 다른 것들과 공존하기엔 이 작고 푸른 별이 그 무게를 다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다. 가능하다면, 언젠가는 그 약속들이 수놓은 은하수를 보고 싶다. 보면서 위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