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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Apr 26. 2020

정말로 해외 인턴십의 기회가

J1 비자를 받기 위한 예측 불가했던 나날들-2

피어나려는 봄의 꽃망울들을 속절없이 얄미워하고 있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럴 새가 없었다.


재수를 하고 휴학도 1년 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하지 못하면 부모님께 너무 짐이 되고 죄송스러울 것 같아서 미국행이 불발되자마자 빠르게 국내 취업을 알아보았다.

이전에 말했듯 나는 복수 전공을 했는데, 그 두 분야가 물과 기름보다도 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분야였기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취업을 준비하느냐도 관건이었다.

사실 마음은 누구보다 디자인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대기업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디자인 업종은 연봉이 그렇게 세지 않았고, 엄마는 내가 디자인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강아지 발톱의 때만큼도 하지 않으셨다. 게다가 장녀인 나에게 거시는 기대는, 수능을 두 번이나 낙방했음에도 여전히 롯데타워보다 훨씬 높았다. 그렇다고 내가 경영학과를 억지로 전공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마케팅 분야에서 일한다면 나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장녀로서의 책임감을 업고, ‘그래, 디자인이든 그림이든 그런 건 취미로 하자.’ 하고 마음먹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마음을 더 야무지게 먹었어야 했나. 이곳저곳 마케팅 팀에 지원해 봐도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고, 있다고 해도 물론 나를 뽑아주진 않았다. 그리고 계속 마음 어딘가에선 ‘정말 난 디자인으로 먹고살 수 없는 걸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부모님이 물어보셔도 어디 지원했단 소리 안 하고 무조건 디자인 회사에만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기대를 아주 안 한 상태에서 지원을 해서였는지, 아니면 너무 절박하게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의지 때문이었는지 생각보다 좋게 봐준 회사들이 많았고, 그중에 경영이랑 디자인이면 광고 디자인 회사에서 좋게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원했던, 어떤 작지만 내실 있는 광고 디자인 회사에 출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광고 업계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갔고, 한 달여만에 대학교에서 배운 몇 년의 시간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철야도 하고, 대한민국의 ‘직장인’이라는 그룹에 제대로 속해갈 즈음,


“클로이 씨, 옵시다, 미국”


어느 날 아침에 눈 떠보니 이런 카톡이 와 있었다. 그것도 처음 해외 인턴을 추진했던 뉴저지의 그 회사에서. 앞뒤 없이 저렇게 쓰인 문자 한 통이 내가 잠든 사이 내 핸드폰에 가만히 와 앉아 있었다.

잠이 확 깨던 순간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나를 데려오는 것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단다. 이번엔 준비를 더 확실히 해서. 그리고 한번 그 볼드모트에게 거절을 당했으니, 두 번째 인터뷰는 다른 사람이 할 확률이 더 높지 않겠냐면서. 서류부터 다시 다 준비하자고. 처음부터 다시 해 보자고.

나는 잠도 안 깬 엄마를 깨워 “나 미국가 엄마.” 하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했다. 엄마도 매일 지하철 역까지 뛰어가서 막차를 겨우 타고 한밤 중에 집에 와 눈 붙였다가 여섯 시에 일어나 다시 출근 준비를 하는 딸내미의 모습이 안타까우셨는지,  반쯤 눈 뜬 채로 “왜? 어디서 미국 다시 오래?”라고 희미하게 말씀하셨다.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고, 매일매일 테일러 스위프트의 ‘Welcom to New York’을 무한 반복하며 출퇴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100퍼센트 들떠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첫 직장에 출근한 지는 한 달여밖에 되지 않았고, 거의 될 뻔했다가 엎어진 사연도 두 번이나 있었기 때문에, JFK 공항에 들어서기 전까지 이 게임은 끝난 게 아니라고 스스로 풍선처럼 들뜨는 마음을 끌어내렸다.


J1 비자를 준비하는 것은 이미 한 번 해 봤지만 또다시 해도 또 긴장이 되는 것이었다. 책 한 권은 될만한 서류들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다 파악하고 있어야 했고, 회사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어떤 직무를 할 건지, 숙식은 어떻게 해결할 건지, 지원하는 회사는 어떤 회사며 그런 것들을 한국어로 해도 힘에 부칠 판에 영어로 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심리적으로 버거운 일이었다. 어릴 때 학교에서나 원어민 선생님들하고 하이 헬로 해 보았지, 한국 토박이가 언제 제대로 외국인과 자유롭게 대화해 본 적이 얼마나 있었겠느냐고. 토익 점수가 회화 실력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이제는 같이 사는 강아지도 알지 않을까? 게다가 이 많은 것들을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한다는 것은 엄청난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이번만큼은 모든 것이 수월하게 넘어갔고 -저번에 나를 거절했던 그 심사 기관에서 다행히도 다른 사람을 인터뷰어로 붙여 줬고, 그 인터뷰어가 ‘아니, 저번 기록 보니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는데 왜 거절당한 거야?’라고 같이 어이없어해 주었다는 뒷 이야기가 있다- , 이제는 드디어 대사관 인터뷰만 남은 상황이었다. 정말 거의 다 왔다. 그동안 준비했던 서류들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에이전시에서 일러준 주의 사항들을 외우고 또 외워서 대사관에 도착했다. 한국도 미국도 아닌 듯한 그곳의 분위기는 가히 사람을 압도했고, 내 앞에 인터뷰를 본 사람들 중에서는 그저 유학을 하려 학생 비자를 받으러 온 것이었는데도 어떤 이유에선지 거절을 당하고 풀이 죽어 나갔다. 그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긴장감에 단단해진 두 어깨를 돌보다 더 딱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대충 차례를 보니 비자 내주길 거부한 그 사람이 나를 인터뷰하게 생겼다. 왜 나는 이런 특이 상황을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나. 왜 내 인생은 시트콤일까.


“하이, 굿모닝.......”

최대한 밝게 웃으며 인터뷰어에게 인사를 시도했고, ‘너 어디서 일하니, 그곳 미국 어디쯤에 있니’ 정도의 질문만 받고는 바로 ‘축하해. 비자 발급될 거야.’라는 말을 듣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어야 2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잘못 알아들은 건가 싶어 이게 다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축하한다고, 여권은 비자 찍혀서 며칠 안에 갈 테니 오늘은 이만 가 보란다. 세상에.

당장 부모님과 에이전시에, 그리고 회사에 연락을 했고, 회사에선 ‘그럼 이번 주 일요일에 봐요.’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사이 계절은 시간을 달려 어느덧 8월 말을 향해 있었고, (한국 나이로) 26년의 시간을 단 며칠 안에 정리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었다.


 

비자 준비를 하던 나와 대사관 인터뷰 당일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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