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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May 03. 2020

안녕, 한국에서의 내 스물몇 해의 나날들

두 개의 캐리어에 내 인생을 담아

당장 이번 주 일요일에 떠나야 한다니.


원래 친구가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막상 일 년 동안은 한국에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누구를 어떻게 만나고 어떤 정리를 해야 하는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친구를 만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짐도 싸야 하고, 무엇보다 일하고 있던 직장에 본의 아니게 갑작스럽게 통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정말 좋아하던 직장이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좋았고, 작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었으면서 무엇보다 디자이너로서의 나를 많이 키워준 회사였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어떻게 말씀을 드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사님을 비롯한 직원 모두의 응원을 아낌없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그 회사가 언제나 번창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늘 감사한 마음을 마음에 품고 산다. 친구들도 뭐 이리 빨리 가냐면서 아쉬워했지만, 나의 꿈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에 모두들 응원해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움이나 아쉬움보다는 기대감과 설렘이 내 마음과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 인연도 없던 뉴욕에 (뉴저지에 간다고 하는 게 더 확실하겠지만, 어쨌든 내가 가장 설렜던 이유는 뉴욕에 가까운 곳으로 간다는 것이었다)가 살게 되었다니. 세계 디자인의 중심인 뉴욕에, 관광도 안 가본 내가 살러 가다니! 가서 돈을 모아 나중에 나중에라도 대학원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트 센터라도 알아볼까? 게다가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가다니. 전부 새로 시작할 수 있다니! 모든 것들이 신나게만 느껴졌었다. 또, 유학이 아니라 가서 직접 일을 하고 돈을 벌며 지낸 다는 사실이 나를 좀 더 뿌듯하게 해 주었다. 부모님 손을 빌리지 않고 해외 생활을 1년 동안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쩐지 나 스스로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게 했다.


일 년 동안 산다고 챙긴 짐은 싸고 보니 큰 캐리어 하나, 중간 크기의 캐리어 하나. 이렇게 두 캐리어가 전부였다. 거기에 배낭 하나. 가져가 봐야 콘센트 전압도 다르고, 가서도 살 수 있는 것들은 가서 사기로 했기 때문에 짐이라 봐야 별게 딱히 없었다. 하지만 그 캐리어 두 개가 왠지 여지껏의 내 인생의 크기 같았다. 캐리어 두 개면 간단하게 정리되는 스물몇 해 간의 삶이라니.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다행이고 감사하게도 가서 머물 집은 그쪽 이사님이 미리 알아보고 계약을 걸어 두셨고, 직접 영상으로 내부와 외관도 보내주셨다. 평생을 아파트에서만 살아왔던 나는 2층짜리 듀플렉스를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아, 물론 나는 그 듀플렉스에 사시는 가족분들로부터 작은 방 하나를 세 얻어 사는 것이었다. 그래도 하우스에서 산다는 사실에 너무 들떴었다.


“미국 뉴욕에서 총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요일이 다가올수록 엄마의 걱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당시 뉴욕에 총기 사건이 있었고, 그건 엄마의 마음을 더 졸여버린 모양이었다. 총기 소지가 가능한 나라에 자식을 보내는 마음이 얼마나 겁이 나셨을지 아직도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엄마는 총기사건에 관련된 뉴스만 나오면 티비의 볼륨을 최대로 키우셨다. 꼭 들어야 할, 곧 미국에 가겠다고 짐을 싸고 있는 댁의 따님이 듣고 마음을 고쳐 먹기를 바라시면서. 일요일까지는 며칠 남지 않았지만 그 며칠이 내내 전쟁 같았다. 저런 곳에 가겠다는 미친 사람이 어디 또 있냐면서, 가서 뭐 좋기만 할 줄 아냐면서, 저기가 저런 데 가고 싶냐면서. 가서 잘하라는 응원은 왜 못해주는 걸까 하는 속상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하는 그 마음을 전부 모른 채 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나는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빨리 가서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고.


드디어 일요일이 왔고, 회사에서 끊어준 티켓을 발권하러 공항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공항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전광판에 ‘뉴욕, JFK’라고 뜨는 것이 내가 비행기를 타면 도착할 곳이라는 걸 아직도 채 실감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보안 검색대를 지나 게이트에 도착했다. 나 혼자였다. 그리고 캐리어 두 개. 보태어 한국에서 일했던 세 달 여의 시간 동안 아기자기했던 월급으로 아기자기하게 모았던 170만 원을 달러로 환전한 천 몇백 불. 이제 이 비행기를 타면 이대로 일 년 동안은 나는 이 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열네 시간의 비행 후에 완전히 새롭게 바뀔 내 인생이 어떨까 상상해 보는 건, 그 어떤 마블 영화보다도 더 다이내믹하고 스릴 넘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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