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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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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May 03. 2020

사막에서 클로이 찾기 -1

지금 (나를) 만나러 갑니다

이쯤에서 잠깐 옆길로 새 보자. 과거 이야기도 좋지만 지금의 이야기도 종종 곁들고 싶다. 과거를 달려 지금과 만날 때까지는.


내가 1등을 해 본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초등학교 때 회장 부회장 중에서 회장을 한 번 맡아본 것도 1등으로 쳐 주려나? 시험 성적에서 100점을 맞은 과목이 있더라도 전혀 1등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100점을 맞은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나마 조금 자랑스러워했던, 고등학교 때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한 번 장원을 탄 것 역시, 나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보다는 지금 현존하는 작가님들 뿐만 아니라 주위 친구들만 봐도 ‘글 잘 쓰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1이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아주 독점적이고 오롯한 존재여서 적어도 나에게는 늘 마치 나방 앞의 촛불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가끔 -아니, 생각보다 자주- 스스로를 아주 작고 미천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학창 시절, 좋아하는 미술시간에 아무리 잘 그리려고 노력해 봐도 그림 그리기에 천재성이 있던 내 친구보다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정직한’ 중학교 내신 역시, 아무리 노력해 봐도 내 옆에 가장 친한 친구보다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만드는 내내 재미있어했던, 사회시간에 내준 수행평가였던 ‘가고 싶은 관광지 팸플릿 만들기’ 마저도, 모든 것을 잘했던 내 단짝 친구의 그것을 본 이후에는 내 것을 다 찢어버리고 다시 만들어야만 했다 -물론 다시 만들었다고 해서 그 애만큼 잘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남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온전히 내 모습을 즐긴 건 아마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였던 것 같다. 아무튼 자신감은 점점 잃어갔고, 팔자에도 없던 소위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에 들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낮은 숫자들을 내 성적표에서 확인하면서, 두 번을 말아먹은 내 수능 성적표를 보면서, 내 안에서 빛나던 나의 보석은 점점 작아지고 빛을 잃어갔다. 경쟁심이나 승부욕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어디에 가도 1등을 할 일은 없을 거라는 괴로운 생각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지금 나이 서른이 넘은 시점에서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긴 하지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나는 그 옆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늘 눈치를 보고 어딘가 주눅이 든 채 사는 중이다.


초등학교 때 한창 유행하던 ‘생각쟁이’라는 어린이 잡지가 있었다. 그중에 개그맨 남희석을 인터뷰 한 기사가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기사의 내용은 대충 ‘2등이어도 괜찮아’였다. 당시에는 이휘재가 남희석보다 더 잘 나갔었나 보다. 그 둘은 환상의 콤비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나는 왠지 본능적으로 남희석을 더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사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그땐 1등 2등이라는 것이 달리기 시합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었는데 (물론 이 마저도 달리기 젬병이었던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어쨌든 인터뷰 기사의 내용은 ‘2등이지만 2등이기 때문에 1등에게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 ‘만년 2등이어도 나는 신나게 살 수 있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고 있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어쩐지 ‘아- 그렇구나’ 하고 그 기사에게 남몰래 마음속에 작은 서랍 한 칸을 내주었다. 고백하건대 이후에 내가 이 기사를 떠올리던 대부분의 시간은 ‘2등이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래도 1등이 좋은 거지. 어차피 1등 아니면 기억도 못해.’ ‘난 1등이 아니니까 쓸모없어.’ 라며 비아냥대기 일쑤였다.


한국 사회 전체에 대해 조소를 날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라 성장하면서 남들과 비교해가며 나 자신을 더욱 작고 하찮게 만드는 일은 적어도 나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이 나라에서는,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괜찮게 보려고 해도 어째서인지 자꾸만 죄책감이 들었다. 공부에 취미가 하나도 없던 누구네 집 딸이 국가 유공자의 후손이라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명문대에 들어갔다더라, 공부 잘하는 걸로 아는 댁의 따님은 -나를 말한다- 그래서 이번에 재수해서 대학은 어디를 갔나요, 어느 집 딸은 남자 잘 만나서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는데. 이 대학이 저 대학보다 낫다더라, 누구는 어디 대기업에 취업해서 앞으로 인생이 탄탄대로라더라. 무엇을 위한 대화인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대화들이 둥둥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곳. 그런 곳이 내가 겪은 한국 사회였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듯 한국에서 탈출했는데, 살아 보니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뉴저지의 한인타운 역시 한국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이 곳 애리조나에 와서야, 한국사회의 문제라고 여기던 그것이 어쩌면 한국사회만의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고, 여기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가 되고 나서야 나는 나 자신에게 조금 더 곁을 내어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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