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두가 안나 미루다가 결국 출국 1주 전부터 급하게 짐들을 박스에 쑤셔 넣고 한국에 총 16박스를 보냈다. 한국에 온 지 3개월이 지나고 보낸 짐들이 하나도 없어도 살만 해졌을 즈음, 그 박스들이 도착해 집 거실을 발 디딜 틈도 없이 장악해 버렸다. 이제 꽤 오래 살 계획을 하고 있는 이 집에서 어디에 뭐를 둘지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민하다가, 푸는데만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이건 또 어디에 넣어야 하나, 꼭 처음 이사 왔을 때 마냥 다이소를 들락날락거리고, 다시 맥시멀리즘이 되어가는 집을 보며 진이 빠졌다.
그렇지만 그만큼 재밌는 점도 있었다. 한 박스 씩 풀 때마다, 아 나 이런 사람이었지. 나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나 이런 거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지. 꼭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가장 반가운 매일 태웠던 향초부터 아끼는 크리스마스 향초, 룸스프레이, 필로우 스프레이 등이 잔뜩 나왔다. 나는 어릴 때부터 모든 감각이 예민한 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귀와 코가 특히 그렇다. 뭐든 냄새를 너무 잘 맡아 단점도 있지만, 행복했던 순간들을 냄새로도 기억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다 (말하고 보니 좀 특이한 것 같지만). 그래서 향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향이 나는 것들을 좋아한다. 향초, 향수, 커피, 와인, 사워비어, 꽃, 베이킹. 코에 마비가 올 때까지 킁킁거리다 보니 새록새록 따뜻한 추억들이 마음을 채운다.
집이 점점 내 취향대로 꾸며져 가는데도 뭔가 허전했는데, 이제야 구멍이 메꿔진 느낌. 낯익은 낯선 도시 서울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