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사춘기

by Chloe 슬기

9월 4일, 다시 돌아온 생일 아침에 지난 날의 회고를 할 때면 늘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간이 있다.


서른이 가까워졌을 때 두 번째 사춘기인가 싶은 적이 있었다. 5년 뒤, 10년 뒤 계획이 다 있었는데 변수 투성이었고 어떤 일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딱히 계절이랄 것이 없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날씨조차도 일 년 내내 반복되는 것 같은 매일을, 하루살이처럼 그날 밀려드는 일과 감정을 치워내며 한 계절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꽉 막힌 101 고속도로 위에서,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난 후 너무나 맑고 예쁘게 개인 하늘을 마주했다. 인생도 그럴 것 같단 희망이 들었다. 힘든 시간들을 지나 언젠가는 나에게도 다시 해가 뜨고 밝게 빛나는 날이 오겠지.


조금 더 재밌게 살아보자, 공책을 펴고 몇 가지 적었다. 예전에 하고 싶었던 거, 관심 있는 다른 직종들 등등. 거기서 이제 나이 제한이 있는 것들, 현실 적으로 불가능한 것 들, 다 긋고 나니 꽤 쓸만한 리스트가 생겼고 “내일 말고 당장 오늘부터” 실행으로 옮겼다. 바텐더 자격증을 따고 발레도 다니고 도자기도 만들고, 하나씩 깰수록 한 걸음 더 발전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진지하게 그다음 꿈을 고민하게 되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난 언제 행복한지 “나 사용 법”을 써 내려가는 제법 값진 시간이었다.


그렇게 연말이 되고 조촐하게 준비한 파티에 친구가 선물을 들고 왔는데, 카드에 적힌 흔한 "새해 복 많이 받아" 문구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이해가 된다. 굴곡 없이 노력하는 만큼 얻으며 한 살 더 먹는 게 별 의미 없던 어린 시절은 지났다. 좋은 일 나쁜 일 하나하나가 마음에 크게 다가오는 요즘. 새로운 해의 시작을 보며 좋았던 일은 마음에 간직하고 나쁜 일은 떨쳐내라고, 이번 연도는 더 나아질 거라는 바람을 담아 happy new year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 하나하나가 감사한."

이 일기를 마지막으로,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지난해를 보내주고 서른이 되었다.



사실 그다음 해도 쉽진 않았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겠다, 나 자신을 위로할 때마다 더 깊은 늪에 빠지는 것 같았다. 처음엔 친구가 나 삼재라던데 그래서 그런가- 넘기다가 또 해가 바뀌어서야, 안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냥 이게 어른의 삶이란 거구나 깨닫게 되었다. 인생은 “힘들거나 평탄하거나” 하는 0과 1이 아니었고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았다. 다 가진 듯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때도 있었고, 그게 물거품처럼 날아갈까 두려워하기도 했고, 역시 영원하지 않았고 잃기도 했다. 그 와중에 어른다운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과 얻은 게 많아진 만큼 커지는 책임감이 마음의 여유를 뺏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시간들 끝에, 난 그만큼 더 둥글둥글한 어른이 되었고 지금의 내가 더 좋다. 나름 풍부해진 감성과 흘려보내 줄도 아는 여유를 선물 받았고,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으며 노력에 결실이 따랐을 때 그 기회에 감사하는 마음을 얻었으니까. 인생이 어려워진 만큼 나도 경험치라는 철갑을 한 겹 더 둘렀으니, 배움이 있으면 그걸로 괜찮다.


삼십 대 중반을 넘어가며 지금은 이렇게 삶을 대하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지금이 바닥이 아니라면 뭐라도 해볼 수 있고, 땅끝까지 실컷 내려온 거라면 곧 또 오르막길이 나온다. 그러다 설령 벼랑 끝이 대신 나오면, 그럴 땐 그냥 구멍을 찾으면 된다. 항상 어떤 식으로던 튀어나오는 솟아날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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