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처음 알게 된것은
파리 여행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한 유튜버의 닉네임이었다.
그녀는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기보다는그냥 완벽주의자처럼 보였다.
아주 세심하고 현실적인 조언과 여행에서 바로 쓸 수 있는 꿀팁들을 알려주었다.
실제로 여행을 하면서 그녀의 정보는 꽤 유용하게 작용했다.
그래서 여행을 갈 때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같은 유튜버가 또 없을까.”
하며 그녀를 떠올리곤 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라.
어쩐지 나를 지칭하는 말 같았다.
나는 기획을 하는 기획자다.
프로젝트가 생기면 기획을 하고 제안서를 만든다.
보통 제안서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은 대략 2주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항상 데드라인이 다가올 때까지 완성을 하지 못한다.
어떤 때는 제출 당일까지도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제출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몰라 마음 졸이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동료들은 종종 나에게 말한다.
“힘 좀 빼. 이번엔 힘 좀 빼고 하자.”
그럴 만도 하다.
제안서가 완성될 때까지 야근과 밤샘 작업은 반복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시안에는 끝없이 수정을 요구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나도 안다. 진상중에 진상이다.
후배들이 욕을 해도 사실 할말이 없다.
나는 종종 변명을 한다.
“원래 벼락치기가 더 집중이 잘 되잖아.”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사회생활에서 나 같은 기획자와 함께 일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사실 나는 제안서를 시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머릿속은 온통 그 프로젝트 생각으로 가득하지만
막상 문서를 펼치고 시작하려고 하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어렵게 완성한 제안서를 보면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마음에 드는 제안서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완성된 제안서를 보면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에는 이런 점을 보완해야지,
저 부분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들이 따라온다.
하지만 알고 있다.
다음에도 아마 100%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작가 눈오리 님은
완벽주의자는 눈을 감으면 된다고 말했다.
정답이었다.
완벽하게 하려고 애쓰다 보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냥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완벽주의자가 기획자로 살아남는 방법은
더 잘 해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눈을 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