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2022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먼저 이 시를 당선작으로 뽑은 심사자의 평을 보겠습니다.
상대적으로 균질성과 언어적 안정감을 가진 이신율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비 오는 날의 스페인’은 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구성해가는 사람살이의 외관과 상태와 속성이 인생론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수작이다. 그 안에는 음식들에 관한 숱한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 스페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 멀리 떠나 있어도 좋을 사랑과 불꽃과 시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수없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의 파노라마가 환상성과 역동성을 함께 거느리면서 그림처럼 사진처럼 다가온 선물이자 이벤트였다. ― 안도현. 유성호
일전에 올린 팁에서 저는 신춘문예의 특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 신춘문예 – 서정성 40%, 알 듯 모를 듯한 멋진 표현 40%, 이해 안 가는 현대시적 표현 20%
어떤가요?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퍼센티지 배분이 적절한가요? 저는 괜찮아 보입니다. 일전에 제가 처음 소개해 드렸던 <반가사유상>에서 심사자의 이목을 끈 시구를 소개했듯이 이 작품에서 어떤 부분이 눈에 들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심사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언급한 이런 부분이었을 겁니다. 물론 이게 왜?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날씨를 핑계로 미나리전을 부치는 발상이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니까요. 근데 이 시의 처음을 보세요.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면서 음울하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비가 내리니까 전을 부친다고 말하죠. 게다가 미나리를 썰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쫑쫑 썰어댈 때의 소리는 경쾌하기까지 합니다. 탕탕 오징어까지 쳐가면서요. 음울한 죽음의 이미지가 경쾌하고 상큼한 이미지로 변했습니다. 이쯤 되면 죽음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죠. 일상의 흔한 모습으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흔히 시에서 발상의 전환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죽음의 이미지를 이처럼 노랫가락처럼 통통 튀는 이미지로 그려내는 게 바로 발상의 전환일 겁니다. 슬픔을 슬픔으로만, 기쁨을 기쁨으로만 말하면 일단 시가 재미가 없어집니다. 당연한 거니까요. 우리는 늘 새로운 것에 끌리잖아요. 비유가 좀 그렇지만, 불륜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이유나 혹은 신상에 끌리는 건 그래서일 겁니다. 그렇다고 다 그런 건 아니고 오래된 골동품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진정한 골동품 마니아는 오래된 것에서 늘 새로움을 본다고 합니다.
제가 서두에서 심사자들의 눈에 띄었을 시구를 말했습니다. 이제 나머지는 부차적인 겁니다. 심사자의 마음을 한번 흔들었다면 나머지는 심사자들이 평소 지닌 시론에 따라 일사천리로 만들어지기 마련입니다. 설령 응모자가 그런 의미로 쓴 게 아닐지라도 심사자는 자신이 발견한 발상의 전환에 더욱 속도를 냅니다. 가장 흔하게는 죽음의 무거운 이미지를 아주 가벼운 일상으로 치환했다거나, 이별의 슬픔이 바닥 깊숙이 고여 있는 게 아니라 경쾌한 리듬으로 날려버리는 역동성쯤으로요.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이 텅텅 비었던 정오의 숲에서 길을 잃고 나를 잃었던 시간들 쓸모없는 것에 관심이 많아 세계를 건너 너에게로 간다고 썼습니다. 우주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 젤리를 뿌리고 스티커를 붙여 내 안에 어떻게 나를 배치할까 궁리합니다.”
단순한 수상소감의 일부일 뿐인데 왠지 멋지지 않나요? 잘만 다듬으면 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별것 아닌 문장이지만, 쓸모없는 것에 관심이 많아 세계를 건너 너에게로 간다거나 사람도 아니고 우주가 보낸 편지에서 깨어난다는 거라든가, 결정적으로 깨어난 나를 찾아 젤리를 뿌리고 스티커를 붙인다는 표현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어떻게 배치할까 궁리한다는 것, 이런 표현 자체가 새로운 발상입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별것 아닌데도 쓱 읽었을 때 느낌이 좋으면 그 문장에는 우리의 마음을 끄는 표현이 들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럼 다시 시로 돌아가 보죠. 수세미를 뜨고 사과를 뜨고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온다거나 사과나무에서 복숭아가 열리는 것들은 전부 소품입니다. 경쾌한 역동성을 전하려는 부차적인 표현이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는 그 전에 나오는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과 같은 대구로 언어의 리듬감이고요. 그런데 왜 꼭 스페인일까요? 다른 나라도 많은데. 그 역시 발음상에서 느껴지는 어감이 마음에 들어서였을 겁니다. 참고로 사과 모양의 수세미를 뜬다는 건 처음에 말한 죽음에도 삶에도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어서일 겁니다.
다만, 앞에서 말한 사과가 ‘apology’라면 사과 모양의 수세미에서 말하는 사과는 ‘apple’인 듯하네요. 죽음이라는 관념을 미나리전을 부치는 행위로 드러나는 것처럼 사과의 관념도 사물로 드러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는 이 표현은 이 작품의 가장 감각적인 표현이겠고요. 정확히 이 지점부터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철든 애가 그린 난해한 그림을 보면서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고 말합니다. 실연의 아픔조차 선물처럼 말하고 이벤트라고 말하죠. 첫사랑이 스페인으로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가긴 너무 머니까 단풍 들지 않는 단양으로 가려고 하네요. 안전벨트를 매고 사진까지 찍으면서요. 첫사랑에 볼이 붉어지는 시기를 지나온 우리는 더는 한철 단풍에 들뜨지 않는 성숙한 자신에게 이른 겁니다. 여전히 비(죽음)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실연, 상실) 떠날지라도요.
이 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무겁고 침울하고 음울한 것들을 정반대의 이미지로 드러내는 게 가능해집니다. 왜냐고요?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잖아요. 참, 참고로 2연의 2행 끝과 3행 시작을 보면 ‘날씨’에서 끝내고 3행 앞에서 ‘를’로 시작합니다. 이런 걸 하나의 행에서 끝내지 않고 다음 행으로 걸친다고 해서 행 걸침이라고 합니다. 같은 형식으로 연과 연을 걸치는 걸 연 걸침이라고 하고요. 김수영 시인이 가장 먼저 시도했다고 하네요.
다시 정리해 보자면 이 시는 제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심사자의 눈에 띄는 그런 표현이 시 전체를 이끌고 가는 겁니다. 여기선 죽음의 무거움을 경쾌하게 나열하면서 실연의 상실감 또한 이벤트일 뿐 거뜬히 지나고야 말 통과의례로 말합니다. 계속 언급하지만,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은 건 정말 신의 한 수입니다. 단순히 비만 왔다면 전은 부칠지언정 경쾌한 리듬감을 주진 못했을 겁니다. 전을 부치면서 젓가락 장단에 맞춰 니나노 가락을 두드리다 보면 오히려 슬픔만 커질 뿐이죠. 그런데 스페인이라는 이국적인 나라를 끼워 넣음으로써 분위기는 죽음조차 아무것도 아닌데 실연이 대수냐며 오히려 선물이자 이벤트가 되는 식입니다.
이번 작품은 부분적으로 시를 해석(?)했는데 사실 시의 해석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시를 쓴 시인 역시 본인이 쓴 시를 읽으면서 매번 새로움을 느낄지도 모르죠. 그러니 해석(?)에 치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처음에 언급했던 눈에 띄는 표현을 어떻게 하면 나도 이런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발상의 새로움에 더 집중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 새로움을 어떻게 하면 음악처럼 리듬감 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점에 집중하는 게 좋습니다. 발상의 새로움은 젊은 사람에게 유리한 게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그들의 생각이 굳어지지 않아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저마다 살아온 시간에 비례하여 생각도 굳어지죠. 모든 걸 법과 도덕의 틀에 자신을 가두어버립니다. 반면 젊은이들은 그러한 법과 도덕보다는 자신의 감정이 더 소중해서 정해진 사고와 틀에 맞섭니다.
시를 쓴 시인이 1959년생이라니 정말 놀라울 뿐입니다. 물리적 나이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으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문청(文靑)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분이 있을까 싶을 정돕니다. 저도 나이가 들수록 이분처럼 살고 싶습니다. 엊저녁 밤 산책 중에 이 곡을 반복해서 듣는데 가을이 온다는 설렘보다 문득 이 여름이 이렇게 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더불어 제가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혼자인 저는 뭐가 그리 좋았을까요? 이 역시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