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올린 게시물을 보면 신춘문예 당선작, 문학상 당선작, 문예지 당선작, 이렇게 각각 한 편씩 올렸습니다. 이건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올린 것인데 실은 오늘 쓸 글을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래도 견본을 먼저 보고 읽어야 도움이 될 것 같았거든요. 앞서 소개한 당선작을 보면 시간이 꽤 지난 작품인데 혹시 설명에 맞는 작품을 들고 온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아닙니다. 소개한 세 작품은 올해 다시 응모하더라도 당선될 확률이 높은 작품들입니다.
그보다 우선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제 생각이 정답은 아니라는 거 꼭 명심하시고, 본인의 습작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버릴 건 버리시기 바랍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문학에 있어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니 정답이 없는 분야에서 당선작을 뽑는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지요. 하지만 세상만사 자본주의는 돈과 명예가 걸린 것이고, 누구든 다 함께 가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좀 더 많이 알 거라고 생각되는 심사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취향에 맞는 작품을 뽑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럼, 제가 생각하는 당선작의 성격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신춘문예 – 당선작 한 편을 살펴보면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전통적인 서정의 비율이 40%쯤 차지하며,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얼추 이해 가능한 게 40%쯤 차지하며, 나머지 20%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가는 현대시적인 속성을 지닙니다. 그러니 신춘문예 당선이 목표라면 전통 서정시만 공부해선 곤란합니다. 알 듯 말 듯한 그런 표현을 많이 익혀야 합니다. 물론 신문사에 따라서 서정성을 7~80% 가까이 보는 신문사도 있긴 합니다만, 대개는 제가 언급한 퍼센트로 배분하는 게 유리합니다. 그렇다면 알 듯 말 듯한 표현은 뭘까요? 그건 어떤 구절을 읽었을 때 이해도 잘 가면서 와- 멋진 표현인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들입니다. 앞서 소개한 <반가사유상>의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없어도 반짝이겠다’ 이런 표현요.
문학상 – 문학상 당선작은 특정한 주제에 관해 쓰는 것과, 자유 주제가 있습니다. 우선 특정한 주제가 있는 건 대개 그 지역의 유·무형 자원을 소재로 한 작품, 즉 문화, 역사, 인물, 전통 등에 관해 쓰는 건데 이때는 해당 지역 홈페이지 문화관광 코너로 들어가면 그 지역만의 특별한 소재가 눈에 뜨일 겁니다. 그걸 쓰면 됩니다. 서정적으로 쓰는 게 유리하지만, 특정한 주제로 쓰라는 건 그 지역을 알리려는 홍보성이 강하므로 결론에 이를수록 소재에 집중하는 게 좋습니다. 다시 말해 소재에 집중해서 서정적으로 쓰라는 말입니다. 또한 직접 가서 보면야 좋겠지만, 여건상 실제로 가볼 수 없다면 쓰고자 하는 소재를 유튜브에서 검색해서 영상으로라도 꼭 보시길 바랍니다. 영상의 소재에서 언급하는 어휘(시어)만 몇 개 곁들여도 리얼리티가 확 살아납니다.
박형권 시인의 <쓸쓸함의 비결>처럼 자유 주제로 쓰는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정성과 현대성의 딱 중간쯤으로 쓰면 좋습니다. 앞서 신춘문예를 언급할 때 정확히는 모르지만, 얼추 이해 가능한 게 40%라고 말씀드렸는데 자유 주제로 쓰는 문학상은 조금 과장해서 100%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때 명심해야 할 것은 현대시적으로 보이려고 어렵게 쓰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독자나 심자자들이 알아야 합니다. 다만, 와- 표현 좋네.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 세우기처럼 알고 나면 별것 아닌데도 누구나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표현이면 좋습니다.
문예지 – 우리가 앞서 소개한 작품 황유원 시인의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서 보셨듯이 문예지는 필(기분, 감정, 느낌)입니다. 속칭 S급으로 알려진 문예지뿐만 아니라 요즘은 B급 문예지 당선작도 이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문예지 당선작은 특정한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말하면 안 됩니다. 시를 읽었을 때 이 작품은 지금 ‘A’에 관해서 말하고 있군, 그런 생각이 들면 탈락할 확률이 높습니다. 또한 가장 명심해야 할 점은 특정 주제로 쓰는 문학상에서 쓰는 서정성을 드러내선 안 됩니다. 퍼센트로 말하자면 알 듯 말 듯한 표현이 3~40%쯤이라면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비율이 6~70%면 좋습니다.
그럼 이런 의문이 들 겁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이 도대체 뭐냐고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건 누구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겁니다. 그런 당선작을 수없이 봤을 테니까요. 문학카페에도 그런 작품이 올라오는데 그런 작품에는 댓글도 없습니다. 댓글도 뭘 알아야 달 텐데, 뭘 말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댓글조차 못 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표현은 어떻게 쓸까? 이게 문젠데요. 제가 현대시를 쓸 때 자주 쓰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든 생각과 또 다른 상황에서 든 생각을 그때그때 적어둡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두 문장을 한번 이어서 써보는 겁니다. 이게 좀 엉뚱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걸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각각의 파편적인 이미지의 낯설거나 유의미한 연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미지들을 잇고 또 잇고 또 잇다 보면 또 다른 이미지를 생성해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예지의 당선작 제목을 보면 제목만 봐서는 이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서정시(대개 문학상 수상작)는 제목만 보면 이 시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가죠. 그런데 문예지 당선작(현대시)은 아닙니다. 그건 바로 다양한 감정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서정시가 우리네 감정에서 기쁨이면 기쁨, 슬픔이면 슬픔, 분노면 분노, 결기면 결기, 이런 식으로 특정한 감정 한 가지를 가지고 쓴다면 현대시는 이러한 감정 전부를 한꺼번에 다 쓰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의 평소 기분이 어떤지 떠올려보세요. 아주 기쁜가요? 아니면 슬픈가요? 아니면 화가 나나요? 아니죠. 대개의 우리는 아주 기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고, 화가 나는 건 아니지만, 또 그다지 좋지도 않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다 가진 게 평소의 마음일 겁니다. 그런 마음을 시로 쓰면 현대시가 되는 겁니다. 물론 슬플 때나 아주 기쁠 때처럼 한 가지 감정에만 충실해서 쓰면 전통적인 서정시가 되겠고요. <세상의 모든 최대화>처럼 현대시를 썼다면 그 작품에서 카타르시스가 분출되는 느낌이 들어야 합니다. 현대시는 그래야 합니다. 뭔지 콕 집어서 해석할 수는 없지만, 묘하게 끌리는 리듬감에서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이랄까요. 그런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야 합니다.
혹자는 또 그럴 겁니다. “아니던데요. 현대시라고 해석이 안 되진 않던데요.” 라고요. 물론 해석이 되는 현대시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정확한 해석일까요? 아닙니다. 시를 쓴 당사자도 현대시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엇에 관해 썼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현대시를 썼다면 그건 문예지에 발표할 만큼의 수준이지, 문예지 신인상에 응모한다면 탈락할 확률이 높습니다. 간혹 심사자들이 문예지 당선작을 뽑으면서 확실한 심사평을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 역시 두루뭉술하게 말하기 뭣해서 살을 붙여서 말할 뿐입니다. 알고 보면 현대시의 심사평만큼 빠져나갈 구멍이 많은 것도 없을 겁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해석이 되는 현대시는 대개 시집용이거나 문예지 발표용이지, 문예지 신인상 당선작으로는 극히 드뭅니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한번 확실하게 정리해 보기로 합시다.
■ 신춘문예 – 서정성 40%, 알 듯 모를 듯한 멋진 표현 40%, 이해 안 가는 현대시적 표현 20%
■ 문학상 – 주제가 있는 경우 : 쓰고자 하는 소재에 집중해서 서정적으로 쓰는 게 유리.
주제가 없는 자유 주제일 경우 : 조금 과장해서 알 듯 모를 듯한 멋진 표현 100%
■ 문예지 – 알 듯 모를 듯한 표현 3~40%, 이해 안 가는 표현 6~70%
이렇게 정리하니까 정말 이상하죠? 문학을 한다는 사람이 이건 뭐 당선만 목적으로 기술적인 요령만 앞세우는 거 아니냐고 탐탁지 않게 볼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학뿐만 아니라 어떤 예술이든 그 과정은 요령을 터득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또 다른 창작욕이 생겨나니까요. 우리가 아는 창작반의 초급, 중급, 고급반은 물론이고 대학의 문창과도 알고 보면 모두 요령을 익히는 과정입니다. 저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저걸 알고 쓰는 거랑 모르고 쓰는 거랑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출발선이 다르거든요.
여기까지 읽어도 현대시는 여전히 답답한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럼, 기분도 풀 겸 아래의 심사평을 한번 보기로 합시다.
1. 미묘한 감칠맛이 느껴진다. 이게 뭐냐는 말이다. 이런 점이 좋다는 것이다.
2. 내면화 능력과 이미지 직조 능력이 상당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기묘한 울림도 좋았다.
3. 한국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희귀한 정서라는 면에서 믿음이 갔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설명은 어렵지만, 낯설고, 이상한 정서에 힘을 실어주기로 하였다. 앞으로가 더욱 궁금해지는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지켜보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
4. 이미 세상을 다 알아버린 비딱하고 사악한 페르소나로 삼아 인간과 세계를 조롱하고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일상 에피소드에 기이한 활력을 부여하는 개성을 선보이고 있었다.
5. 당선자의 작품에 대한 첫인상은 이상했다. 모호하고 관념적이었다. 게다가 "추깃물", "만나"와 같은 고전적인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모호해서 그만 읽고 싶은 피곤한 작품이 있고 모호해서 끌려드는 매력적인 작품이 있다. 앞의 것이 형상화 실패의 결과라면 뒤의 것은 의미와 무의식적 확장이다. 우리는 작품을 읽으며 '이게 뭘까?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하고 끌려들어 갔다.
6. 낯설고 이상한 감각을 향해 꿈틀거리는 시편들로 가득해서 신비로웠다. 그러나 아직은 많이 모호하였고 의미 형성이나 객관화가 덜 된 상태의 개인적인 발화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7. 고통을 형상화하는 비교적 익숙한 방식의 화법과 역시 크게 낯설지 않은 여타 이미지의 연쇄가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8. 아직 습작 초기의 감상적이고 전형적인 서정시의 흔적이 강해서 자기 색깔을 분명하게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수사를 지탱하는 것이 별로 아프지 않은 상처를 과장하는 감상성이어서 더욱 아쉬웠다.
9. 서사의 세목이 선명하고 마감도 힘이 있어서 가장 오래 내려놓지 못한 작품이다. 유려하고 부드러운 감각과 감수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웠다. 기시감이 문제였다.
1~5번은 당선의 이유고 6~9번은 탈락의 이윱니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제 생각으로는 심사자 역시도 당선작이 왜 좋은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탈락의 이유는 어떻습니까? 그 역시도 마찬가집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어떤 작품을 먼저 떨어뜨릴까요? 그렇습니다. 선명한 표현과 부드러운 언어 감각과 감수성, 개인적 발화, 감상성, 감상적이고 전형적인 서정시의 흔적 등이 탈락의 이윱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이걸 거꾸로 뒤집어보면 심사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시는 바로 이런 시들이고 역설적으로 그들이 이해하는 시였기에 탈락한 겁니다. 물론 억측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문예지 심사평이 이런 식이라는 겁니다.
잘 보십시오. 당선의 이유가 명확한 게 있습니까? 미묘한 감칠맛? 기묘한 울림? 희귀한 정서? 이상한 정서?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에 기이한 활력? 우습지 않습니까? 심사자가 작품의 뜻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잘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표현의 방식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엇을 말하는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지 보는 거죠. 탈락의 사유를 보면 알겠지만, 완벽히 이해되면 오히려 탈락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6번 같은 경우는 당선의 사유로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탈락의 사유로 개인적인 발화를 내세웁니다. 왜 그럴까요? 개인적인 발화에 감칠맛이 없었나요? 기묘한 울림이 없었나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심사자가 응모자의 작품을 다 알고 당선작으로 뽑는 게 아니라는 말씀, 오히려 다 알면 내가 알 정도니 익숙한 표현, 기시감이라는 이유로 탈락입니다. 기묘한 발상의 문장을 많이 써보세요. 앞 시구와 뒤의 시구를 의미상으로 연결하려고 노력하지 마시길요. 호흡을 길게 가져가는 훈련도 많이 하시고요.
그럼, 이제 알 듯 말 듯한 문장은 어떻게 연습해야 할까요? 제가 하는 방법은 당선작을 많이 읽기도 하지만, 단편소설을 많이 읽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장편소설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소설에 뜻이 없는 분들은 분량적인 면에서 단편을 권합니다. 아무튼 소설을 읽다 보면 멋진 문장이라든가, 가슴 절절한 문장이라든가, 평소엔 잘 안 쓰거나 모르는 어휘들이 많이 나올 겁니다. 그런 걸 볼 때마다 따로 메모해 두면 좋습니다. 그리고 그걸 시적인 문장으로 바꿔보는 겁니다.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고, 특히나 사랑 노래는 가사가 참 좋습니다. 다들 드라마나 영화 보면서, 음악 들으면서 눈물 날 때 있잖아요. 왜 눈물이 나는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한 줄로 써놓으세요.
또 유난히 기분 좋은 날이나,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문득 여름이 다 갔다고 느껴지는 순간, 귀뚜라미가 들리던 그 밤... 그때마다 떠오르는 문장 한 줄씩 써놓으시길요. 그리고 어느 날 써둔 문장을 이어보세요. 처음엔 이상할 겁니다. 의미 연결이 잘 안될 테니까요.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제가 앞서 말했죠. 현대시는 뜻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게 아니라고요. 필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심사평처럼 미묘한 감칠맛, 기묘한 울림, 희귀한 정서, 이상한 정서,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에 기이한 활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알 듯 모를 듯한 시를 제일 좋아합니다. 얼핏 봐선 무슨 말인지 이해 안 가는 현대시도 싫어하지는 않지만, 이런 현대시들이 알고 보면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사소한, 아주 지엽적인 현상을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단지 표현 방식에서 흔한 말로 쌈박하달까요. 참, 쉬운 감정이나 현상을 이렇게 에둘러 말하는 것도 재주구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아무래도 나이 든 사람들보다 언어 감각적으로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인정해야겠지요. 그래서 젊은 세대가 현대시를 많이 쓰는 거지, 딱히 현대시가 더 뛰어나서 그렇게 쓰는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신춘문예, 문학상, 문예지 당선작, 그리고 문예지 발표작(혹은 시집), 이 네 가지는 그 스타일에 맞춰 쓰는 게 중요합니다. 참, 그리고 알 듯 말 듯한 시를 쓰는 저만의 방식은 단편소설 한 편을 읽고 그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을 시로 써보는 식입니다. 소설 속에서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한번쯤 비틀면 그럴듯한 제목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시를 쓸 때는 제목을 잘 잡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목에서부터 필이 느껴질 때가 많거든요. 젊은 세대의 현대시 제목을 보면 가히 말장난의 향연쯤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게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만큼 말을 비트는 능력 하나만큼은 좋다는 거겠죠.
서정시를 잘 쓰는 사람이 모호한 시도 잘 쓰고, 현대시도 잘 쓸 확률이 높습니다. 또 반대로 현대시를 잘 쓰는 사람이 서정시도, 모호한 시도 잘 쓸 확률이 높습니다. 어차피 다 같은 시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고, 결국 시는 말놀이니까요. 그러니 특별히 어떤 게 낫다고 구별하기보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써나가는 게 어쩌면 진정한 실력자일 겁니다. 어느 한쪽만 그럭저럭 쓰고 다른 한쪽은 전혀 못 쓴다면 그거야말로 언어적 불구겠죠. 집을 지을 때도 가장 중요한 게 기초공사이듯 시의 기초공사는 아무래도 서정입니다. 서정이 탄탄하지도 않으면서 말장난 같은 겉멋에 취해 현대시만 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현대시는 말장난일 뿐, 진정한 시는 서정이라고 우기는 것도 스스로 발전 가능성을 차단하는 겁니다. 그러니 두루두루 열심히 써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