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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만 Oct 25. 2024

문예지) 세상의 모든 최대화 / 황유원​(1)

  앞서 소개한 두 편의 시는 여러분들이 보셨듯이 신춘문예 당선작과 문학상 당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시는 문예지 당선작입니다. 문학동네 당선작이죠. 감이 옵니까? 속칭 S급으로 분류되는 문학동네 당선작이라고 하니까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죠. ㅎ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시를 먼저 소개하지 않고 설명부터 먼저 합니다.


  왜냐하면 습작기에 있거나, 이제 시에 좀 흥미를 갖게 된 분들이 시를 먼저 보면 이게 무슨 말이야? 아이고 길기도 하네, 도대체 이게 왜 당선작이야, 이런 생각이 들 게 뻔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요. 시를 어느 정도 아는 분이라도 이렇게 쓰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현대시를 곧잘 쓰시는 분들이라면 이 시가 왜 당선작이 됐는지 한번 읽어보면 느낌이 올 겁니다.


  여기서 제가 왜 느낌이라고 말했냐면 그런 분들조차도 느낌일 뿐이지, 확실히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제가 결론을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문예지, 흔히 S급이나 A급으로 분류되는 문예지의 시들은 대개가 이런 스타일이라는 겁니다. 다음에 올릴 글에서 다시 한번 설명하겠지만, 문예지 당선작들은 조금 어려워 보이는 시를 선호해섭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춘문예 당선작보다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누아르 영화 좋아하세요? 저는 누아르라고 하면 주윤발 주연의 「영웅본색」이 떠오릅니다. 비장한 음악과 슬로우 모션이 가미된 액션 같은 거죠. 일단 폼 나거든요. 문예지 당선작을 저는 그런 종류로 봅니다. 일종의 폼이나 멋입니다. 멋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사람마다 취향이 다 다르거든요. 설령 멋의 정의가 확실히 있더라도 그조차 느낄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필’이 온다고 할 때의 그 ‘필’이죠. 그러니 문예지의 현대시는 ‘필’로 느끼면 됩니다. 기승전결 식으로 해석하지 마세요.


  이쯤 말하면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시가 더 궁금할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이번엔 당선작으로 뽑은 전체 심사평과 네 분의 심사자가 각각 어떤 코멘트를 했는지 살펴볼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앞으로 우리가 현대시를 읽어나갈 때 꼭 참고해야 하거든요. 이 역시 다음에 한 번 정리해 볼 생각이니 오늘은 이 시의 심사평만 먼저 봅시다. 우선 전체적인 심사평은 이렇습니다.




  “놀랍게도, 본심은 불과 십 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네 분의 심사위원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당선자로 염두에 둔 응모자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을 응모한 황유원씨였다.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황유원씨의 작품이 어째서 우수한가에 대해 잠깐 동안 의견을 교환하고 그를 당선자로 최종 확정했다. 마라톤이 되기 일쑤인 심사회의를 백 미터 달리기로 만들어준 황유원씨에게 축하의 인사를, 함께 달려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렇게만 보니까 시가 상당히 궁금하죠. 그럼, 네 분의 심사자가 각자 평가한 걸 보기 전에 제가 읽어본 이 시의 대략적인 내용을 비속어를 써서 아주 간단히 말해보겠습니다. 기차가 기타를 졸라 많이 싣고 갑니다. 철로는 기차도 무거운데 기타까지 졸라 많이 실었으니 압사 직전이겠죠. 근데 기차가 뭐 손가락이 있나요. 발가락이 있나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힘 안 듭니다. 진짜 힘든 건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그게 없을 때 힘들겠죠. 아까 기타를 실었다고 했으니 기타리스트에게 손가락이 없거나 발로 움직이는 애벌레가 발이 없다면 어떨까요? 거의 죽음이죠.ㅎ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죽지 않고 살려면 약을 먹어야겠죠.


  그래서 다음 이미지에서는 ‘약’이 주 소재로 나옵니다.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가듯이 약에 따라붙는 이미지는 병과 환자죠. 처음엔 기타를 졸라 실었는데 이젠 약을 졸라 싣고가는 기차가 나옵니다. 그리고 탈선하는 기차, 쏟아지는 약들. 환자들은 그 약을 먹어야 살 수 있으니 애벌레처럼 기어서라도 갑니다. 아까 발가락을 언급할 때 말했던 애벌레가 환자인 셈이죠.ㅎ 기어서라도 갈 수 있는 거리가 바로 최대로 갈 수 있는 거리일 테고,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의 제목에서 말하는 ‘최대화’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됩니다. 엎어지고 깨지고 넘어지고 부서져서 쏟아진 것들이 어디까지 뻗어가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주워 담으려고 어디까지 나아가는지. 일테면 원상복구랄까요.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술을 많이 마셔서 토할 때의 느낌 같은 거요. 아니면 급똥 신호가 와서 변기에 앉자마자 좌-악 퍼지는 설사라든가. ㅋㅋ 다들 그런 경험 있으시죠? 아무튼 그게 무엇이든 사방 좌우로 한꺼번에 좌-악 퍼져간 것들의 황량한 이미지가 생각났네요. 그걸 다시 정리해야 하는 수습 같은 것들요. 그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좌-악 퍼져간 것들에게서 느낀 감정을 적은 게 뭐 그리 대단한 작품일까요? 맞습니다. 대단한 거 없어요. 그런데 그걸 표현한 형식(표현)이 기가 막히다는 겁니다. 제가 일전에 올린 게시물에서도 얘기했죠. 현대시의 묘미는 표현의 형식에 있지,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리듬감이 차고 넘칩니다. 마치 파도가 일렁이듯이 출렁출렁, 마치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의 리드미컬함이죠. 제가 사랑의 행위를 예로 든 이유는요. 왜 누구는 만족(당선)하고 누구는 만족 못 할까요(탈락)? 전희도 전희지만, 리드미컬한 움직임 없이 행위에만 집중해서입니다. 이 시의 당선 이유는 아까 언급한 것처럼 큰 이유 없이 리듬감 있게 앞으로 왔다가, 뒤로 갔다가 우로, 좌로 가면서 넘어지고 엎어지고 일어나서 다시 기어가고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주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기차나 기타나 약이나 환자, 병은 그걸 말하기 위한 소재일 뿐이죠.




  그럼 내용 소개는 이쯤하고 그걸 떠올리면서 이제 네 분의 심사자가 어떻게 평가했는지 한번 봅시다. 그리고 다른 작품을 떨어뜨린 탈락의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비판적으로 말한 게 곧 탈락의 이유일 테니 그건 제 임의로 표시하겠습니다.


  김혜순 시인-이미지 구축의 묘미라고나 할까. 형식이 내용을 구축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역시나 형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본 셈이죠)


  시를 읽고 있노라면 이미지들이 시 텍스트의 표면을 부풀리면서 상승하고, 하강하면서 숨겨진 차원을 드러내는 모습이 유쾌하고도 풍자적이다. 능숙하게, 세련되게 나선형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미지를 타는 재미도 남다르다. 그렇지만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리듬의 구사, 너무 능숙한 이미지 운용은 오히려 시인 스스로 경계해야 할 덕목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탈락의 사유-감각의 낯선 부분을 두드리는, 그런 드문 기쁨을 주는 시들을 만나기를 바랐다. 무릇 새로운 시인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다면 서툴지만 깊거나, 낯설지만 다층적이거나, 어눌하지만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확장한 시들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남진우 시인-이 응모자는 언어를 다루고 시적 얼개를 짜고 상상력을 진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고 있으며... 기차와 기타를 넘나들며 화자가 펼치는 분방한 진술은 음악으로 표상되는 예술적 도취의 세계에 대한 갈망과 현실에서 그것의 좌절을 힘있게 전달하고 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황유원씨의 「세상의 모든 최대화」를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올해는 이 사람이 당선자가 되거나 아니면 당선자가 없겠구나. 다행스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당선자를 뽑지 말자고 주장하는 심사위원은 아무도 없었다.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이런 도입부는 분석이고 뭐고 하기 이전에 바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의미와 리듬이 서로 뒤엉켜 달려나갈 조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탈락의 사유-좋은 서사를 만들어낼 능력은 없지만 재치 있고 세련된 문장을 쓰는 일 정도라면 자신 있다, 라는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는 응모자가 적지 않다고 느꼈다. 번듯하게 시의 꼴을 갖춘 작품들에서 그런 내심이 감지될 때면 답답함이 커진다.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문장을 써놓고 그 문장이 자신이 투여한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맥락도 없이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주어와 술어를 어색하게 연결하기만 하면 이근화나 신해욱의 좋은 시와 비슷하게 보일 거라 믿는 것일까. 소설에 비해 시가 독자를 속이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사행성 글쓰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이문재 시인-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활달한 상상력이었다. 활달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시적 대상이나 시 속의 상황, 또는 시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대해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누가 알겠냐마는" "말하자면" "상관은 없겠지만"과 같은 표현은 거리를 확보하지 않으면 쉽게 구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렉기타, 알약, 포도주를 가득 싣고 가는 기차—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시는 제법 강한 흡인력을 내장하고 있었다.


  시 쓰기에 대한, 아니 삶에 대한 은근한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자폐적 독백을 뛰어넘는 개방적 대화의 문체에 신뢰가 갔다. 근래에 만나기 힘들었던 구심력-방사선적 상상력이었다.


  탈락의 사유-고양이와 개가 곳곳에서 출현하고 각주(脚註)가 수시로 달렸다. 다양한 서체(書體)를 동원했고, 그럴수록 문장이 길어졌다. 부모나 가족이 등장할 때는 어김없이 대화체였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분량이 길었고, 길어진 만큼 산만했다. 시를 수렴, 확장시키는 중심이 없었다. 무엇을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했다. 쓰기 자체에 대한 열정만 대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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