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나도 은빛 금빛 테를 두른 물금이었다고 한다. 나는 둥근 것들 속엔 장엄한 힘이 들어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방울방울 피는 공기방울소리로 빚어진 검은 수달이었으니, 무사의 칼만큼 화평한 해질녘의 수면을 더 좋아했다
파로호 전체가 꽃병으로 둥글어질 때였다. 나는 수면 위로 파문을 긋는 물갈퀴의 촉을 생각한다. 나를 깨울까 말까 하는 양수: 물비늘의 꿈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나는 곡옥모양 물오리 발자국이 갈대숲에 드는 시간을 감지하게 되었다
파로호에는 발설되지 않은 수달의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버들치 꼬리에서 튀는 잔광들이 웅숭깊어진 시간, 나는 입안에 든 황복 뼈 몇 점에 목을 졸리기도 했다. 그러나 황쏘가리 눈알을 빼먹는 걸 편애한 나는, 그날그날 잠재운 물금이 넘치는 새벽에 태어났다고 한다
오늘도 나는 수평선이 언제 일월성신을 잠재우는지, 어느 순간 물고기가 물너울에 가슴 베이며 죽는지, 그 경계의 작은 평화에 대하여 생각한다. 나는 파로호를 지키기 위해 파랑물이 되었다. 저만치 나보다 한 뼘 웃자란 물수리가 공중에서 물속 세상의 나를 물위로 낚아 챌 때였다
2013 제1회 평택 생태시 문학상 당선작
아래는 이 시를 당선작으로 뽑은 심사자의 평입니다.
이병일 시인의 세계를 향한 사유(思惟)의 흐름은 심오(深奧)하다. 화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존재에 대한 인식의 전제는 ‘둥근 것들 속엔 장엄한 힘이 있다’이다. 둥근 것은 원형(圓形)이자 원(元)형(亨)이며 원(元)형(亨)이(利)정(貞)이며 사계절의 순환(循環) 사이클이다. 곧 순리요 화평이며 화평은 평화다. 진정한 무사의 칼은 평화를 지키는 데 있다는 인식이다.
원형의 파로호 호수는 평화다. 그런데 그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수직의 직선들이다. 수직의 직선들이 평화로운 둥근 원형을 파괴한다. 원형은 둥글다. 둥근 것은 장엄한 힘이 있다. 장엄함은 비장함이다. 이는 푸른 생명성을 간직하여 온유함을 지향하며 끝없이 새로운 평화의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열망이다. 원형 속에 꿈틀거리는 메시지는 자연의 환경이요 생산의 근원인 모태성인 것이다.
반면에 직선은 동적이다. 둥근 원형을 향해 돌진하여 그것을 파괴한다. 냉혹하다. 전투적이다. 이 직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문명성을 상징한다. 생명과 평화의 기치를 숨기고 자연환경을 여지없이 공격하여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이러한 잔혹한 자연생태계질서의 파괴, 무질서, 혼란 등 그 투쟁의 현장에서 화자는 약자(弱者)이자 선(善)한 자의 편에서 물수리로 상징되는 강자(强者)의 공격을 온몸으로 저항하는 평화주의자, 박애주위자의 숭고한 최후를 보여줘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이병일 시인은 관념적 철학적 사유와 비견할 만한 문학 사상(思想)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생태시에 대한 한 차원 높은 고귀한 인식론적 철학적 가치를 구현시켰다고 하겠다.
일단 심사평을 보면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주역》에서 말하는 천도의 네 가지 덕을 말합니다. 즉, 원(元)은 봄에 속하여 만물의 시초로 인(仁)이 되고, 형(亨)은 여름에 속하여, 만물이 자라나 예(禮)가 되고, 이(利)는 가을에 속하여, 만물이 이루어져 의(義)가 되고, 정(貞)은 겨울에 속하여, 만물이 거두어져 지(智)가 된다는 이론이죠. 심사자가 이 말을 꺼낸 까닭은 자연은 원형이정의 원리를 되풀이하여 끝없이 순환함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심사평을 보면서 조금 주눅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심지어‘원형이정’이라는 말을 처음 듣거든요. 시가 이렇게 심오한 이치를 말하는데 내가 제대로 읽었을 리가 없지. 역시 당선작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나는 죽었다 깨나도 이런 시는 못 쓰겠어. 그러면서 처음에 느꼈던 왠지 모르게 좋았던 감정이 사라지고, 이제는 시가 어렵게 보일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게 바로 심사평을 쫓는 우리의 마음이며, 온갖 시 창작 이론서를 보면서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남는 거 하나도 없는 이윱니다. 어디 술자리에서나 문학모임에서 주저리주저리 하면서 말빨이야 서겠지만요.
그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시를 쓴 이병일 시인이 심사자의 평처럼 주역의 ‘원형이정’을 염두에 두면서 썼을까요? 시인은 작품 어디에서도 직선의 파괴성을 말하지 않는데 심사자는 왜 이 시를 평하면서 곡선과 직선의 대결로 몰아갈까요? 굳이 직선을 떠올릴만한 표현으로는 수평선과 물너울에 가슴 베인다는 거, 그리고 물속 세상의 나를 낚아채는 물수리의 이미지 정돈데 말이죠. 그건 바로 ‘화평’과 ‘평화’를 부각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파괴에 있고, 곡선의 이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건 직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심사자의 평은 그들 스스로가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 위해섭니다. 문예지에서는 심사자인 자신이 이해하면 새롭지 않다는 이유로 떨어뜨리는 반면 문학상은 알 듯 모를 듯한 표현일지라도 심사자들에게 이해돼야 합니다.
제가 심사평을 썼다면 아마도 저는 ‘신은 직선을 만들지 않았다.’는 표현도 넣었을 겁니다. 자연은 곡선을 추구하지만, 인간은 직선을 추구해왔고, 그로 인해 자연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훼손되어 왔으니까요. 이 시는 제가 팁으로 올린 글에서처럼 주제가 있는 문학상이라는 점에서 ‘원형이정’과 곡선과 직선의 대립을 들먹이지 않아도 생태계 훼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심사자는 이 작품에서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을까요? 일단 ‘파로호의 파랑물’이라는 제목입니다. 어절로 보자면 분명 두 어절임에도 한 호흡으로 읽히는 유려함입니다. ‘파로’와 ‘파랑’이라는 동음적인 어감에서 느껴지는 출렁이는 이미지도 한몫했고요. 내용상으로 마음을 끄는 표현을 적어보자면 ‘둥근 것들 속엔 장엄한 힘이 들어있었다고 생각한다.’, ‘방울방울 피는 공기방울소리로 빚어진 검은 수달이었으니, 무사의 칼만큼 화평한 해질녘의 수면을 더 좋아했다’, ‘꽃병으로 둥글어질 때였다.’, ‘나는 곡옥모양 물오리 발자국이 갈대숲에 드는 시간을 감지하게 되었다’, ‘버들치 꼬리에서 튀는 잔광들’, ‘~걸 편애한 나는’, ‘물고기가 물너울에 가슴 베이며 죽는지’, ‘나는 ~를 지키기 위해 파랑물이 되었다’, ‘물수리가 공중에서 ~ 나를 ~낚아 챌 때였다’
이 중에서도 둥근 것들 속에는 장엄한 힘이 있고, 무사의 칼만큼 화평한 해질녘의 수면을 더 좋아하고, 꽃병으로 둥굴어질 때랑 마지막에 낚아챌 때였다는 표현이 우리가 이 시를 처음 읽을 때 왠지 모르게 좋았던 부분인데 심사자 역시 그랬을 거라는 겁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시구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입니다. 그러니 「파로호의 파랑물」은 무사의 칼만큼 화평하고자 한 이야기인 셈이죠. 모르긴 해도 앞으로 어떤 시인도 시를 쓰면서 무사, 칼, 화평을 따로따로 사용할 순 있어도 이 세 가지 중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다 쓰면 표절을 떠나서 양심에 찔릴 겁니다. 그만큼 핵심 중에서도 핵심어라는 거죠.
또한 이 시는 산문시로 쓰였는데 보통의 운문시로 쓰였다면 행갈이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니 시를 쓸 때 무조건 운문시로 쓰면서 어느 지점에서 행갈이를 해야 할지 고민하지 마시고 그때는 이렇게 산문시로 써보길 추천합니다. 이번 작품 같은 경우 1~3연의 첫 행을 보면 ~이었다고 한다, ~때였다, ~있었다고 한다,로 리듬감을 줬고 4연에서 마무리를 짓는 식입니다. 황복 뼈 몇 점이라든가, 황쏘가리 눈알은 얼마든지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있는 거고요. 파로호가 있는 화천군에 한국수달연구센터가 있으니, 수달은 파로호를 말하기에 좋은 소재였을 테고요.
이 작품은 생태시 문학상 당선작이지만, 굳이 생태시에 한정하지 않아도 참 좋은 작품입니다. 2013년 당선작인데 같은 시인이 2014년 <문예바다> 여름호에 발표한 「물속 파랑의 편지」라는 작품도 오늘 소개한 「파로호의 파랑물」의 연장선으로 읽혀서 간단한 해석과 함께 소개합니다. 쉬어가기 글에서 말했지만, 제가 <이 시(詩)는 어떻게 당선작이 됐을까?>에서 소개한 작품들은 올해 다시 응모하더라도 당선작으로 뽑힐만한 작품들입니다. 앞으로도 가능한 그런 작품 위주로 소개할 생각입니다.
물속 파랑의 편지 / 이병일
여기 수달의 편지가 와 있다 그러니까 젖은 버들강아지 냄새와 지느러미를 감추고 비린내를 풍기는 편지가 와 있다 물의 봉투를 찢고 나는 물갈퀴 지문이 다 지워진 물속 편지 속으로 들어간다 모래무지 옆구리에 박힌 무지갯빛 때문에 편지의 활자들이 가장 아름다워진다
귀퉁이 잘린 편지, 산천어의 푸른 비명을 찢는 수맥들이 문장들을 가닥가닥 풀어놓는데, 어제 죽은 조약돌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짝이며 수평선의 젖을 빠는 소리가 들린다 지느러미 달린 치어들이 물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겨 갈수록 꽃잎 아가미를 낚아챈 달빛의 미늘도 보인다
나를 앞질러 뛰어가는 것들은 노을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땅거미, 그러나 나의 한쪽 눈은 영원히 물속 세상을 볼 수 없지만, 한쪽 눈으로 명멸과 경멸로 수군대는 파로호의 적을 응시한다 그때마다 나는 목에 물결무늬를 걸어 놓고 그림자와 똑같은 영법으로 사는 것이 화목하다고 믿었다
물속에서 나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질투하듯 사랑하기로, 그때마다 대책 없이 흘러나오는 평화에 대한 믿음이 나를 치장했다 여직 발각되지 않는 나는, 공기방울 소리를 주워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내 몸에 스며들다 튕겨 나가는 수초들도 있다, 오늘도 파로호 가장자리는 스멀스멀 말라 가는데, 젖은 눈의 수달은 물속 파랑의 편지를 읽는다
* 보시면 시어와 이미지 전개 방식에서 두 작품이 아주 닮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대략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수달의 편지에 적힌 것처럼 물속은 썩어가는데 물 밖에서 보는 파로호는 그저 평화롭게만 보인다는 내용입니다. 물속 편지를 읽어봐도 모래무지 옆구리에 박힌 무지갯빛은 아름답게만 보이거든요. 산천어의 푸른 비명이 가득한데도 죽은 조약돌은 여전히 반짝이고 수평선의 젖을 빠는 소리는 평화롭게 들립니다.
언제나 나를 앞질러 뛰어가는 것들은 노을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땅거미여서 화자는 그림자의 영법으로 사는 것이 화목(평화)한 거라고 믿습니다. 평화에 대한 믿음으로 치장하며 자신을 속이는 거겠죠. 그러니 파로호는 말라가고 젖은 수달만이 물속 파랑의 썩어가는 모습을 읽을 겁니다. 여기서 화자는 나인 동시에 젖은 수달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현실로 끌어오면 파로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일 테고, 썩어가는 물속은 부패로 가득한 현실의 민낯이 아닐까요.
짧지 않은 글, 읽느라 애쓰셨습니다. 늘 무엇에 쫓기는 게 우리네 삶이고 보면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음을 보면서 여러 생각들이 들 겁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마시고 글로 남기시길요.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오래 남는다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