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형만 Oct 25. 2024

문예지) 열 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 / 강혜빈

숫자를 좋아하는 흰 토끼는 편지를 써 오라고 했어

거짓말을 완벽하게 훔친 아이에게 내주는 특별 숙제

말랑말랑한 지우개 똥 연필 끝에 꾹꾹 뭉쳐

사랑하는 선생님, 저희가 잘못했대요.


시험지 위로 진눈깨비가 내리는 교실


무서운 이야긴 속으로 해야 더 무섭지

칠판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모르는 아이가 빳빳한 채로 상장을 받고

종례가 끝나면 답장이 왔어

아니, 너희가 아니라 너지.


안으로 접힌 귀 토끼의 가장 단순한 장점

만져보고 싶어 3분의 1로 나뉜 귀

왜 우리들은 밋밋한 귓바퀴를 가졌지?

좀더 수학적으로 생기질 못하고


어렴풋이 웃고 나면 어른에 가까워질까?

토끼의 진짜 얼굴은 손목에 새겨놔야겠어

기다리는 미술 시간은 오지 않는데


명치를 찌르면 실내화가 미끄러지는 마술

복도 끝과 끝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봐

부풀어 오른 선생님, 시리도록 하얀,


뒷문에서 굴러 나오는 귀 두 짝

청소 도구함에 숨은 눈알

창문에 붙은 천삼백일흔 개의 입 그리고 입


나는 토끼를 해부하는 상상을 했을 뿐인데요?

책상 밑에 숨어 지우개 똥만 뭉쳤는데요?



2016년 문학과 사회 시 부문 신인상 당선작




  심사평을 보자면 너무 길어서 다 옮겨쓸 수는 없고, 간단히 한 줄로 적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이미지 전개 과정이 개성적이고 감각적이며 활달한 어법으로 동화적인 상상력을 매끄럽고도 유려하게 펼쳐내고 있다."


  어떤가요? 심사평을 보고 시를 다시 보니까 확실히 개성적이고 활달하고 매끄러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번 쉬어가기에서 문예지는 알 듯 모를 듯한 표현 3~40%, 이해 안 가는 표현 6~70%라고 했는데 이쯤이면 문예지 당선작은 통상적인 서정시로는 힘들다는 걸 분명히 아셨을 겁니다. 다만, 이 작품은 이해 안 가는 감각적인 표현이 아니라 동화적인 모티브로 풀어가는 작품이기에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시뿐만 아니라 현대시에서 어떤 상황을 이미지로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니 이번 기회에 익혀두면 좋습니다. 제가 시를 쓴 사람도 아니니 백 퍼센트 올바른 해석은 아닐 테지만, 얼추 맞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 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열두 살의 아이로 추정됩니다. 모르는 '입꼬리'라고 한 걸 봐선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의 입꼬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 일이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시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부정적으로 쓰인 듯합니다.


  1연을 보시면 숫자를 좋아하는 흰 토끼가 편지를 써 오라고 했습니다. 다음 행에서 특별 숙제라고 한 걸 보니 아마도 반성문 같은 걸 말하는 거겠지요. 숫자를 좋아한다니 흰 토끼는 수학 선생님이겠고요. 거짓말을 완벽하게 훔친 아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그 이전에도 아이들은 거짓말을 자주 훔쳤나 봅니다. 이곳이 배움을 갈고 닦는 교실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아이들의 이런 행위도 결국은 어른들을 보고 배운 것이니 아이들은 어른인 선생님의 거짓말을 보고 배웠을 수도 있겠네요.


  아이들은 말랑말랑한 지우개 똥을 연필 끝에 꾹꾹 뭉쳐 반성문을 씁니다.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지우개 똥을 꾹꾹 뭉쳤다고 했으니 화자는 선생님에게 일종의 반항을 하네요. 어른들의 거짓말을 따라 했을 뿐인데 반성문을 쓰라고 했으니 큰 의미가 없는 셈이지요. 그러니 반성문을 쓰면서도 아이들은 비꼬듯 말합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저희가 잘못했대요. 여기서 '잘못했습니다'가 아니라 '했대요' 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억지로 시키니 누군가의 입을 빌리네요.


  2연에서 화자는 생뚱맞게 '시험지 위로 진눈깨비가 내리는 교실'이라고 말합니다. 어릴 때 우리 시험지를 채점하면 틀린 답과 맞는 답에 동그라미와 빗금이 난무한 걸 떠올리면 되겠네요. 동그라미는 눈이고 빗금은 비가 되었으니 진눈깨비가 시험지 위로 내리는 꼴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맞추니 자연스럽게 이 표현은 선생님과 아이 중 누군가는 맞는 말을 하는 것이고 누군가는 틀린 상황이겠네요.


  3연에서 참과 거짓이 어지럽게 뒤섞인 교실에서 진실은 드러나지 않고 있네요. 진실이 사라진 세상을 떠올려보세요.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세상은 무서운 곳입니다. 무서운 건 드러나지 않을 때 더 무서운 법이겠고요. 아이들은 잘 알고 있죠. 무서운 이야긴 속으로 상상했을 때 더 무섭다는 걸. 이 나라의 교육을 뜻하는 칠판이 두 쪽으로 갈라집니다. 참과 거짓이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는 상장은 빳빳할 종잇장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수학 선생님이 써오라고 한 편지를 썼더니 답장이 왔습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 바로 너지!! 라며 찍어 말하는데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겠네요. 왜 믿지 않을까요? 이유는 4연에 나옵니다. 숫자를 좋아하는 흰 토끼의 귀가 안으로 접혔거든요. 이는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거지요. 아이는 3분의 1로 나뉜 귀를 만져보고 싶어 합니다. 접힌 귀를 세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을까요?


  '왜 우리들은 밋밋한 귓바퀴를 가졌지? / 좀더 수학적으로 생기질 못하고' 아이들은 밋밋한 귓바퀴지만 어른들처럼 귀가 접히지 않아 진실을 듣습니다. 수학적으로 생기질 못했다면서 어른들의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행동을 또다시 비꼬고 있네요.


  어렴풋이 웃고 나면 어른에 가까워질까? 크게 혼나지 않으려면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어렴풋이 웃는 타협적인 행동으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5연에서 자조적으로 되묻네요. 그러면서 거짓된 어른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토끼의 진짜 얼굴은 손목에 새겨놔야겠다고 합니다. 모든 걸 계산적으로 재고 따지는 현실이 수학 선생님이라면 계산이 없는 정직한 사회는 미술이겠죠. 하지만 그런 세상은 쉽게 오지 않을 듯합니다. 기다리는 미술 시간은 오지 않는데..라고 했으니까요.


  6연에서 선생님이 회초리로 아이의 명치를 꾹꾹 찌르며 반성하라고 복도 끝으로 미네요. 실내화가 미끄러집니다. 그걸 마술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앞의 미술과의 언어유희로 보입니다. 수업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참(미술)과 현실에서 어른들이 보여주는 교묘한 거짓들(마술)은 겉으로 봐선 비슷하죠. 마치 복도의 '끝'과 '끝'이라는 글자가 겉으로는 똑같은 것처럼요.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보라고 아이에게 꾹꾹 찌르며 말합니다. 참과 거짓을 아는 아이는 망설입니다. 복도 '끝'과 그냥 '끝'은 표현은 같은 듯 보이지만 현실은 분명히 다르니까요. 부풀어 오른 선생님, 선생님이 화가 많이 나신 듯~ㅎ 시리도록 하얗다는 걸 보니 세상 참 냉정합니다.


  뒷문에서 굴러 나오는 귀 두 짝 / 청소 도구함에 숨은 눈알/

  아이들이 숨어서 엿듣고 있습니다. '창문에 붙은 천삼백일흔 개의 입 그리고 입

  그렇게 무수히 많은 입속에서 나오는 말들이 열두 살 아이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지배적으로 작용합니다.


  '나는 토끼를 해부하는 상상을 했을 뿐인데요?'


  아이는 선생님으로 빗댄 어른들의 속내를 까발리거나 밋밋한 귓바퀴를 지닌 자신을 자조하듯 대답합니다. 그리고 또 말하죠. '책상 밑에 숨어 지우개 똥만 뭉쳤는데요?' 선생님의 가르침을 지우개로 지워서 의미심장하게 똥으로 뭉쳤다며 항변하듯 묻습니다.




  이 시는 가까이서 보면 학교에서 벌어지는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서 명치를 꾹꾹 찔러대는 잘못된 체벌을 그리고 있지만, 인식을 확장하면 진실을 외면하는 무수히 많은 접힌 귀, 이 사회의 폭력적인 현실을 고발하는 거겠지요. 이러한 폭력적 현실을 더 확장해본다면 지난날 미투 현상에서 조명한 여성의 인권을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로 규정하는 것 또한 또 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시는 8년이 지난 올해 다시 응모하더라도 여전히 당선권에 들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앞서 소개한 <문학동네> 당선작 '세상의 모든 최대화'가 다양한 이미지의 변주로 써나갔다면 이번 작품은 같은 급(?)의 문예지임에도 동화적 상상력으로 그 뜻을 숨겨놓고 독자들이 찾아내길 바라고 있죠 여기서 '숨겨놓고'가 중요합니다.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장치인 셈이죠.


  오늘은 이 글을 올리면서 조금은 회의감이 밀려왔습니다. 글이란 게 저마다 각자 알아서 쓸 일이고,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받아들일 사람은 스스로가 충분히 알아서 쓸 능력이 될 텐데 말이죠.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언어적 지식이 권력을 새롭게 지탱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기에 이르며, 감옥의 죄수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거리를 활보하는 순한 죄수일 수밖에 없다고 했죠. 문단 권력이라는 말이, 그리고 그에 순응하고자 발버둥치는 언어적 지식의 얄팍함이 어쩐지 도긴개긴으로 가련하게 느껴지는 밤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