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내 손바닥 속 성취의 감각

by Dean

내가 처음으로 핸드폰을 가졌던 날이 떠오른다.

SPH-X4900. 4096 컬러 화면에 40화음 벨소리의 작은 기계.

중학교 2학년의 나는 비로소 최고의 전자제품을 손에 쥐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단순히 조른다고 물건을 사주지 않으셨다.

항상 ‘계약서’가 따라왔다.

처음 핸드폰을 사달라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나에게 계약서 작성을 제안했다.

내용은 명쾌했다. 중간고사 또는 기말고사에서 평균 95점을 넘을 것,

그리고 성적표를 받아온 그 주 주말에 가장 최신 핸드폰을 구매해 주겠다는 약속.


처음 이 계약서를 썼던 중학교 1학년 때는 평균 95점이라는 숫자가 불가능해 보여 일찍이 포기했었다.

그냥저냥 평범하게 공부하며 80점 정도의 성적에 안주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겨울방학이 되자 핸드폰을 향한 열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중학생 신분에 고가의 물건을 살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결국 ‘공부’라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겨울방학 내내 하루 정해진 시간을 꼬박 채워 공부했고,

부족한 부분은 학원까지 보내달라며 공부에 매달렸다.

그렇게 맞이한 2학년 첫 중간고사.

내 성적표에는 평균 96.5점이 찍혀 있었다.

그 주 주말, 나는 부모님과 함께 용산으로 향해 당시 가장 최신 모델이었던 그 핸드폰을 손에 넣었다.

이 핸드폰은 단순히 운 좋게 얻은 선물이 아니라,

내가 내 욕망을 스스로 성취해 낸 첫 번째 ‘전리품’이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 스스로를 밀어붙였던 기억이 평생의 자산이 된다고 한다.

중학생 시절의 내게 이 핸드폰은 단순한 통신 기기를 넘어 '성취의 감각' 그 자체였다.

평균 95점이라는 높은 벽을 넘기 위해 보냈던 지루한 겨울밤들이,

용산 매장에서 처음 폴더폰을 열었을 때의 전율로 보상받던 순간.

그 짧은 순간의 쾌감은 내 인생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에 걸맞은 값을 치르고

당당히 쟁취하면 된다는 명료한 삶의 원칙을 배운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인간의 의지를 예찬했다.

중학교 2학년 소년에게 96.5점의 성적표와 최신형 핸드폰은 일종의 '극복의 상징'이었다.

단순히 새로 나온 핸드폰을 가져서 기뻤던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과 맺은 계약을 이행했고,

그 결과물이 내 손바닥 위에 실재한다는 사실이 나를 뿌듯하게 했다.




이제는 이 성취감의 정체가 '도파민'이라는 것을 안다.

최근에는 자극적인 영상이나 SNS에 의한 '도파민 중독'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조되고 있지만,

사실 도파민은 인간을 성장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하기 싫은 것을 이겨내고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 느끼는 단단한 만족감.

이 고귀한 감각의 도파민은 타인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오직 스스로 일궈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 애나 렘키는 그녀의 저서 《도파미네이션》에서

뇌의 ‘쾌락과 고통의 저울‘ 원리를 설명한다.

뇌는 쾌락과 고통을 같은 곳에서 처리하며, 이 둘은 저울의 양 끝처럼 평형을 유지하려 한다.

우리가 SNS나 게임 같이 단순하고 쉬운 쾌락만 쫓으면

저울은 반작용으로 인해 더 큰 고통과 무력감 쪽으로 기울어진다.

하지만 반대로 공부나 운동 같은 '지연된 보상'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먼저 선택하면,

뇌는 수평을 맞추기 위해 우리에게 훨씬 더 건강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선사한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의 유혹을 견디며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그 고통의 시간은

내 뇌의 저울을 성취라는 쾌락으로 기울게 하기 위한 정직한 준비 과정이었다.


보도 섀퍼가 말한 《멘탈의 연금술》 또한 이와 맞닿아 있다.

그는 "성공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성취를 위한 연료로 전환하는 법을 안다"라고 했다.

지루함이라는 비천한 금속을 황금 같은 성취로 바꾸는 연금술.

96.5점의 성적표와 바꾼 그 폴더폰은, 내 인생에서 뇌의 저울을 주체적으로 조절해 본 첫 번째 승리의 기록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 나는 더 이상 핸드폰을 사기 위해 계약서를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용산 매장에서 느꼈던 그 순수한 성취의 감각은

여전히 내 삶을 움직였던 성공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유독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그 사물의 기능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손에 쥐기까지 우리가 쏟아부었던 ‘시간의 밀도’와 그 과정에서 단련된 '멘탈의 근육' 때문일 것이다.

《도파미네이션》의 조언처럼, 가짜 쾌락의 홍수 속에서

진짜 성취의 도파민을 지켜내는 힘이 필요하다.

시련을 견디고 원하는 것을 얻어본 사람만이 다음번의 더 큰 도전을 기꺼이 환영할 수 있다.

가장 화려한 사양의 기계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인내를 선택했던 정직한 성취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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