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인제 내 흔적을 담은
초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이키 신발이 너무 갖고 싶었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가는 빠른 길을 두고 일부러 멀리 돌아 나이키 매장 앞에 섰다.
쇼윈도 너머의 그 매끈한 운동화들을 매일같이 응시하는 것이 내 하굣길의 마침표였다.
초등학생의 나는 차마 매장에 들어갈 용기까진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두세 달을 부모님을 졸라 생일 선물로 받아낸 내 생애 첫 나이키 운동화.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 농구화의 블랙 & 화이트 색 조합과 실루엣이 눈에 선하다.
나는 그 신발을 신었다기보다 모셨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밖에서 돌아오면 휴지에 물을 적셔 조심스레 겉면을 닦았다.
행여 찢어질까, 때가 탈까 노심초사하며 현관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어린 내게 그 나이키 운동화는 단순히 발을 보호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신발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마땅히 부합하는 단어를 찾기가 어렵다.
굳이 고르자면 약간의 과시욕과 나도 저런 쿨한 것을 드디어 가졌다는 만족감 정도일 것 같다.
대학생이 되면서도 나는 옷보다는 신발에 더 신경을 썼다.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오는 날이면 그동안 찜해뒀던 운동화를 하나씩 구매했다.
그러다 부모님이 세탁을 잘못해서 신발이 망가진 걸 보고 난리를 피웠던 기억도 있다.
그러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 신발을 샀었다.
이름도 잊어버리지 않는 ‘조던6 카마인‘이었다.
지드래곤이 신어서 정말 구하기 어려웠던 이 신발을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비를 모았고,
웃돈을 얹어 커뮤니티를 통해 미개봉 신제품을 구매했다.
가격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45만 원.
학생이었던 나에게는 너무 비싼 신발이라 착용했던 횟수가 열 번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지퍼백에 실리카겔까지 넣어 공기 접촉을 최소화하며 보관했다.
하지만 그렇게 그 신발은 세월이 지나 결국 내부 부식으로 신을 수 없게 되었다.
애지중지 모셔두었던 카마인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망가졌다.
지퍼백 안에서 공기를 차단하며 영원히 새것일 줄 알았던 신발은,
정작 신어주어야 할 주인의 발걸음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사그라졌다.
그 허망하게 망가진 신발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사물은 사용되지 않을 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본질을 잃고 죽어간다는 것을.
신발의 숙명은 닳아 없어지는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고흐의 구두를 보며 말했듯,
신발은 지면을 딛고 세상을 헤쳐 나가는 ‘고된 보폭’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신발로서 존재한다.
아끼느라 신지 않은 신발은 그저 고무와 가죽 덩어리에 불과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닮아있을지 모른다.
나중을 위해, 혹은 완벽한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던 감정과 경험들이
정작 삶의 현장에서 쓰이지 못한 채 마음의 지퍼백 안에서 부식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나는 더 이상 신발을 지퍼백에 가두지 않는다.
비싼 값을 치른 신발일수록 더 자주 신고, 더 먼 곳까지 걷는다.
굽이 비스듬히 닳아가는 것은 신발이 망가지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이 지구 위에 나의 궤적을 성실히 새기고 있다는 훈장 같은 기록이라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손길이 닿고 나의 흔적이 남은 물건으로서 그 가치가 더해진다고 믿는다.
현관에 놓인 신발을 본다.
어린 시절처럼 젖은 휴지로 닦지는 않지만,
먼지 묻은 그 모양새에서 내가 오늘 하루 얼마나 치열하게 세상을 딛고 서 있었는지가 읽힌다.
신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걸어온 만큼 닳고, 내가 견뎌낸 만큼 해지며
묵묵히 나라는 존재의 하중을 받아내 줄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 운동화가 얼마나 깨끗한 상태로 남느냐가 아니라,
이 운동화를 신고 얼마나 많은 나만의 영토를 누볐느냐는 것이다.
부식되어 사라질 박스 안의 '카마인'보다,
비에 젖고 흙이 묻어도 내 발과 함께 숨 쉬는 오늘의 운동화가 내게는 훨씬 더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