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 헤밍웨이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는 1899년 7월 21일 미국 시카고 근교의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성악가였습니다. 부유하고 교양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헤밍웨이는 둘째이자 장남으로 형제자매는 모두 다섯이었습니다.
헤밍웨이의 어머니는 아이들의 옷을 성별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는 ‘빅토리아풍’을 따랐기 때문에 어린 시절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여자아이 옷을 자주 입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훗날 어머니와의 불화와 그의 집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머니의 강요로 유년시절 첼로를 배웠으나, 이는 어머니와의 큰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어릴 때 받은 음악 레슨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할 때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거칠고 강한 성정을 닮았는데 아버지의 외모와 성향을 빼닮은 헤밍웨이는 그를 잘 따랐다고 합니다. 사냥과 낚시, 캠핑을 좋아하던 아버지로 인해 모험적인 활동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다양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강인함을 동경했던 그의 마음은 사실적이고 단단한 문체에 반영됩니다.
젊은 시절, 기자로 활동했던 헤밍웨이는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려 미 육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시력의 문제로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적십자사 소속의 구급차 운전사로 참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으로 자전적 소설인 <무기여 잘 있거라>를 집필하게 됩니다.
이후 미국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웠고 더 넓은 경험을 하고자 파리에 몇 년간 체류합니다. 후에 키웨스트와 카리브해, 쿠바 등 세계 전역을 다니며 식견을 넓혔고 마초적인 성격으로 호탕하고 방탕한 생활도 했는데요. 그런 와중에도 집필은 절대 멈추지 않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총 4번의 결혼을 했습니다. 첫 부인인 해들리와는 1921년부터 5년의 결혼 생활을 했고, 두 번째 부인인 폴린, 세 번째 부인 마사와도 약 4년 만에 결별했으며 마지막 메리 웰시 헤밍웨이와 1946년에 결혼해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1948년 헤밍웨이와 부인 메리는 유럽으로 떠나 베니스에서 몇 개월간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작가는 19살 소녀 아드리아나 이반치치와 정신적 교류를 하며 플라토닉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그걸 바탕으로 <강 건너 숲 속으로>를 집필했으나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게 됩니다.
이후 화가 난 헤밍웨이는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8주 만에 노인과 바다의 초고를 집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노인과 바다>를 집필하는 것에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머문 쿠바에서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거친 바다에서 청새치를 낚은 경험과 와일드하고 진취적인 그의 성정이 만나 작품에 여실히 드러나는데, 작품 속 간결하고 남성적이며 감정의 표현은 거의 없는 문체와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는 섬세한 감정을 서술하는 것이 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사실의 묘사만으로 충분한 공감을 이끌어 내는 위대한 작품을 쓰는 데 성공합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에는 허무주의(절대적 가치와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사상)와 평화주의도 강하게 드러나 있답니다.
반복된 결혼과 파혼을 하며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말년에는 우울증과 여러 지병으로 결국 자살(1961년 7월 2일)로 생을 마감하게 된 헤밍웨이. 그의 대표작으로는 <우리들의 시대에, 1925>,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1926>, <무기여 잘 있거라, 1929>,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1935>,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940>, <노인과 바다, 1951>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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