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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Oct 13. 2023

직업으로서의 기자

231013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예전에 사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책장에서 찾을 수가 없어 결국 새로 사버렸다. 왜 하필 이 책이 읽고 싶었을까. 여름부터 한 권씩 하루키 소설이며 에세이를 본 영향이 일단 있겠지만 설명이 부족하다. 이전에 읽었던 책이란 점은 다들 같지만 <직업> 빼고 나머지는 책장을 보다가 문득 꺼내든 것이었다. 반면 <직업>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읽고픈 마음이 커져 결국 새 책을 사고 말았다. 통장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다.



  곰곰 생각해 보니, 일에 대한 고민이 요즘 심해진 탓 아닐까. 책 맨 뒷페이지를 열어 초판이 나온 시점을 보니 2016년 4월25일, 한참 방송국 시사교양 PD로 일하던 때다.

  그땐 하루키가 말하는 소설가가 어째 PD랑 비슷하다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설가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려고 한다(20p)"는 당연한 말이 인상깊었다. 나는 PD를 하면 꼭 SBS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알고싶다> 같은 프로그램은 시사 이슈를 다루면서도 스토리텔링 기법을 적극 활용하는 듯해서였다. 다큐멘터리도 이야기를 잘 짠 작품이어야 재미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직업>을 처음 읽은 시점엔 그 '스토리'라는 데 좀 진력이 난 터였다. 소설은 상상의 산물인데도 하루키는 '비효율적'이라고 썼다. "소설이라는 형태로 전환하자면 반년씩이나 걸리는 메시지나 개념도 그걸 그대로 직접 표현하면 단 사흘 만에 언어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PD는 그 상상의 재료를 현실 취재를 통해 얻어야 한다. 지금이야 스토리텔링이란 게 여러 기법 중 하나이면서도 어느 기법에나 조금씩 녹아있고, 하루키의 소설관이 그러하듯 당시 내 생각도 수많은 PD관 중 하나라는 것을 알지만 그땐 그 비효율성이 괴로웠다. 그렇게 이르게 된 기자라는 직업도 글 한 줄 쓰기 위해 취재를 거듭해야한다는 걸 그땐 왜 생각지 않았을까. 정작 기자가 된 뒤에는 내러티브 저널리즘이니 뭐니 하며 스토리 논픽션물 저술을 꿈꾼다는 것도 우습다. 딱히 후회하진 않지만.




  하루키 에세이를 여럿 읽은 사람은 하루키가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언제인지를 안다. 1978년 4월, 도쿄 진구 구장에서 야쿠르트와 히로시마의 경기를 보던 도중, 1회 말 야쿠르트 선두 타자 데이브 힐턴이 친 2루타와 관중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신화에 가까운 장면이고 나도 예전에 흥미롭게 봤지만, 지금은 하루키가 말하는 이런저런 디테일이 더 좋았다. 이를테면 '문학상'에 관한 생각. '소마 유유'라는 가명 저자가 아쿠타가와상(일본에서 권위있는 문학상)과 관련해 "떨어지고 문단을 멀리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씨 같은 작가가 있어서 점점 더 그 권위의 가치가 드러난다"고 쓴 글을 인용하며 하루키는 이렇게 비꼰다(조롱하는 말투마저 좋음).


  내가 문단에 거리를 둔 것은 아쿠타가와상을 타지 않았던(혹은 타지 못했던) 것 때문이 아니라 그런 장소에 발을 들이미는 것 자체에 처음부터 관심도 없고 지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 추론과 단정을 구별해 사용하는 것은 문장법의 기본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도 않은 건가요?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62~63p


무진장 잘 깐죽거린다. '이얏호!'


  하루키가 취하는 태도는 섬세하다. 레이먼드 챈들러, 넬슨 올그런 등 문학상을 무시한 이들의 사례를 들며 '참된 작가에게는 문학상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주 많다'고 적으면서도,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많은 경우, 구체적인 형태에 의한 게 아니면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 또한 진실입니다. ... 그리고 사람들은 그 '형태'에 눈길을 던질 수 있습니다"라고 쓴다. 그의 바람은 상을 받았니 어쩌니 하는 등 기준을 포함해 "일률적으로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업종은 다르지만, 기자 일을 하기 전에는 나도 이것저것 기자상을 받은 사람들만 대단하게 여겼다. 나머지 기자들은 뭐하는 지도 사실 몰랐다. 밖에서 언론계에 가하는 가장 쉬운 비판은 '보도자료 긁어서 기사 쓴다' '(특히 정치부) 정치인 말 옮기는 기사나 쓴다'는 건데, 탐사보도니 심층보도니 안하는 기자들은 대충 비판받을 만한 일이나 하며 사는가 싶었다. 자료가 나오면 빠르게 읽어보고, 자료 내에서 앞뒤가 안맞거나 기존에 알려진 사실 내지 맥락과 다른 내용은 없나 체크한 뒤 질문하며, 그걸 토대로 하루하루 되도록 정확한 기사를 쓰는 이들의 가치를 잘 몰랐다. 주장의 사실관계를 검증한 뒤 기사를 쓰면 가장 '저널리즘' 가치에 부합하다는 걸 모르지 않으나 하루가 아닌 시간, 분 단위로 쪼개 기사를 써야 조회수(이윤)는 물론 업계 영향력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의 압력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지 못했다. 정치부에선 '말'이 곧 팩트이며, 정치인의 워딩을 기록해야 나중에 검증이고 뭐고 할 수 있다는 논리도 몰랐고(물론 진짜 그냥 자료 긁고 대충 워딩 받아적고 끝내는 기자들도 없지 않습니다만).

  상 따위 한 번 받은 적 없지만, 출입처가 두려워하고 다른 기자들이 슬참조하는 기자가 송곳처럼 한둘 있음을 지금은 안다. 이들에 대한 보상 체계가 업계 안팎에 별달리 없다는 것이 비극이다. 장관 등 주요 인사의 임명을 앞두고 검증 기사를 잘 쓰거나 사회 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을 발굴해낸 기자가 상을 받는 데에야 불만이 없다. 운좋게 각 회사 기획부서에 속해 여러 회차 펼치는 시리즈를 쓰면 상을 받기 쉬운데, 뭐 이 또한 개인 운이며 그마저도 잘 못해 상 못타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좋은 기사마저 점점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게 요즘 현실이고, 업계는 전체적으로 '기레기'라는 비판에 익숙해지다 못해 자멸을 향해가며, 연봉 수준은 날이 갈수록 타 업계 대비 낮아진다. 게다가 상을 주는 한국기자협회니 뭐니 조직들의 심사위원회 기준도 믿기 어렵다. 같은 출입처 기자들은 뭐가 결정적 보도였는지 다들 아는데 전혀 엉뚱한 기사에다 상을 준다거나.


  내가 진지하게 염려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 사람들을 향해 어떤 작품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뿐입니다. - 77p


  내가 여기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건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점입니다. 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격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작가가 행해온 작업의 성과도 아니고 보상도 아닙니다. 하물며 결론 같은 것도 아니에요. 어떤 상이 그 자격을 어떤 형태로든 보강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작가에게는 '좋은 상'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혹은 도리어 방해물이 되고 성가심의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럽지만 '좋은 상'이라고 할 수 없다, 라는 얘기입니다. - 83~84p


  하루키의 말에 동의하지만, 기자 업계의 보상 체계에 대해선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업계 평균으로 본다면 기자들 연봉이 높겠지만, '성공한' 케이스에 있어선 그 양상이 크게 다르다 보니. 작가가 받는 보상 규모는 그 한계가 정해지지 않는 반면 기자가 성취 가능한 보상이래봤자... 업계 사람들이 인정? 반대로 여기저기서 칭찬받는 기자가 얼마나 엉망으로 취재하는지, 또는 저널리즘 윤리 따위엔 관심 없는지 보여주는 사례를 나는 여럿 알고 있다. 이건 제대로 된 '시장'이 아닌 것이다.




  글의 소재에 대해서도 하루키는 꽤 통찰력 있는 이야기를 한다. 작가 경력의 초기부터 그는 문학장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꽤 고민했던 듯하다. 전쟁을 몸소 겪지도, 전후 혼란과 빈곤에 시달리지도 않은 세대의 일원은 무엇을 쓸 수 있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쓰려할 때 심정을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이건 뭐, 아무것도 쓸 게 없다는 것을 쓰는 수밖에 없겠다', 어쩌면 그게 자기 세대가 앞선 세대와 차별화되는 점일 수도 있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와 문체가 필요합니다. 기성 작가들이 써먹지 않았을 만한 비이클=언어와 문체를 새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써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할 경우 시동이 걸리기까지 상당히 힘이 들지만 일단 비이클이 기동력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오히려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써야할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당신이 가진 것이 '경량급' 소재고 그 양이 한정적이라고 해도 조합 방식의 매직만 깨친다면 그야말로 얼마든지 스토리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 작업에 숙달된다면, 그리고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깜짝 놀랄 만큼 '무겁고 깊은 것'을 구축해나갈 수 있습니다." - 131~134p


  기사도 비슷하지 않나. 권력자의 비위, 기관의 해태, 위법, 부정의 같은 누가 봐도 기사화되기 좋은 소재를 찾아내면 좋지만 늘 그렇게 하긴 어렵다. 그럼 더 대단한 기사거리를 찾아 하염없이 헤매야 하나? 그런 게 특별히 없는 시공간에서도 누군가는 요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집단 내부의 미묘한 갈등을 엿보게 하는 이야기를 발굴한다. 기자들끼린 스트(레이트) 기사거리를 찾는 능력과 박스기사 소재를 발굴하는 역량을 나누곤 하는데, 딱 떨어지는 분류는 아니지만 위와 대충 맞을듯. 둘 다 잘하면 물론 좋겠지만 보통 기자들은 둘 중 어느 한 쪽 기능에 더 특화돼 있고 거기서 전공에 따라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간다. 물론 전통적으로 인정받는 기자 유형은 전자. 하루키가 꼽는 "소재에서 힘을 얻어 스토리를 써나가는 유형의 작가"의 대표격은 헤밍웨이인데, 그 역시 기자 출신이다. 하루키도 둘 중 어느 쪽이 낫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소재에 안 기댄다고 할 뿐.

  근데 이런 말은 왜 써둔 거냐고...


  나이가 들수록 체험이 부여해주는 다이너미즘은 역시 조금씩 저하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떤지는 물론 본인이 아니고서는 모를 일이지만, 헤밍웨이는 노벨 문학상을 타기는 했어도(1954년) 알코올에 빠져 1961년 명성의 절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 135~136p



   

  하루키가 이 책에서 인용하는 작가들의 말, 글이 대체로 마음에 든다. 딱히 뭐 함의를 정리해두고 싶진 않고, 그냥 좋아서 옮겨 봄.


  일전에 <뉴욕 타임스>(2014/2/2)를 읽노라니 데뷔 당시의 비틀스에 대해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They produced a sound that was fresh, energetic and unmistakably their own. (그들이 창조해낸 사운드는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 나는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로 그러한 '심적인 상태'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멋진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난 것 같은 - 113p


  한 문장을 수없이 다시 읽으면서 여운을 확인하고 말의 순서를 바꾸고 세세한 표현을 변경하는 등의 '망치질'을 나느 태생적으로 좋아합니다. ... 내가 경애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도 그런 '망치질'을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내고 그것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쉼표 몇 개를 삭제하고,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똑같은 자리에 다시 쉼표를 찍어 넣을 때, 나는 그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라고. - 163~164p


위 내용과 무관. 만득이는 아마도 이런 분류를 좋아할 것이다.




  하루키가 통념에 맞서 옹호하는 소양 둘. 하나는 꾸준한 체력 관리고, 다른 하나는 비움이다. 밤새 술도 마시고, 질펀하게 놀기도 하며, 어떻게는 영혼을 찢고 구겨봐야 예술가라고들 하지만 하루키는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좋은 작가가 될 수도 있지만, 다른 길도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반대로 소설가는 사람의 심리, 특히 어두운 면까지 들여다보고 또 상상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꽤 터프해야 하며, 긴 글을 오래도록 앉아서 쓰고 고쳐야 하기에 물리적 체력도 상당해야 한다.



  이야기의 끝이 '달리기' 홍보로 이어지는 게 좀 와닿지 않긴 한데, 말의 취지엔 백이십프로 공감했다. 드라마 <미생>에서 바둑 선생님도 어린 시절 프로기사를 꿈꾸던 장그래에게 말하지 않았나. "이기고 싶으면 네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 밖에 안돼." 게다가 이 승부는, 단편이건 장편이건 하나 낸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직업' 이니까.

  '오리지낼리티'를 갖기 위해선 작가가 뭔가를 채우기보다 비우고 빼는 데 능해야한다는 지적도 흥미롭다. ... 근데 아직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겠음. 일단 적어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정보 과다라고 할까 짐이 너무 많다고 할까. 주어진 세세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태에 빠집니다. 그렇다면 우선 필요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 계통을 깨끗하게 해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것입니다.
  ...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애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혹은 자기 자신까지도-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 106~110p


  그의 달리기, 규칙적인 글쓰기 등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는 심지어 예술가 따위 아니어도 상관 없다는 말까지 쓴다. 이상하게도 내겐 이 문단이 이번 독서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 중 하나였다.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된다 싶어도 어떻게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 그런 건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그래서야 공장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분명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소설가가 예술가가 아니어서는 안 되는가. 대체 누가 언제 그런 것을 정했는가. 아무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우선 '딱히 예술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 150p  




  하루키가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며 쓴 아래와 같은 문단에서 오래 머물렀다. 순수하게 질투가 나서. 기자로서 내가 어떤 기사로 나중에 기억될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도 없거니와, 누가 기억할 만한 기사를 쓰기는 할지 가능성부터 일단 높아보이지 않지만, 나도 어쨌든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기자건 소설가건 웹툰 작가건 영화 감독이건 다르지 않을 게다. 이같은 경험을 하는 이에게 부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흐뭇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내 소설이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집은 삼대에 걸쳐 무라카미 씨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라는 편지가 이따금 날아옵니다. 할머니가 읽고(그녀는 나의 예전 '젊은 독자'였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가 읽고, 아들이 읽고, 그 여동생이 읽고. 그런 일이 아마도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정말 기분이 환해집니다. 한 권의 책을 한 지붕 아래 몇 사람이 돌아가며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 273~274p


  연봉도 별로, 사회적 인정도 그닥, 만드는 콘텐츠의 생명력도 글쎄... 정리하자면 내 일이란 게 고작 이런 모양인데, 나는 왜 지금도 업계를 떠나지 않는가.

  말해도 사람들이 믿어줄 것 같지 않지만, 나 역시 이따금 아래와 감각을 떠올린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말처럼 일이란 어쩔 수 없이 '치명적인 권태'를 동반하는지 모른다. 그 지루한 반복을 견뎌내게 하는 건 어쩌면 희망보다는 기억 아닐까. 한번이라도 '가능성'을 엿보았던 순간의 짜릿하고 따뜻한 감각과, 웃자란 희망과 절망을 잇대어가며 지껄였던 시간들.


  삼십여년 전 봄날 오후에 진구 구장 외야석에서 내 손에 하늘하늘 떨어져 내려온 것의 감촉을 나는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그 일 년 뒤의 봄날 오후에 센다가야 초등학교 옆에서 주운 상처 입은 비둘기의 온기를 똑같이 내 손바닥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런 기억이 의미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터인 뭔가를 믿는 것이고, 그것이 키워낼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감촉이 나의 내부에 아직껏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 56~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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