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3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문단에 거리를 둔 것은 아쿠타가와상을 타지 않았던(혹은 타지 못했던) 것 때문이 아니라 그런 장소에 발을 들이미는 것 자체에 처음부터 관심도 없고 지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 추론과 단정을 구별해 사용하는 것은 문장법의 기본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도 않은 건가요?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62~63p
내가 진지하게 염려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 사람들을 향해 어떤 작품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뿐입니다. - 77p
내가 여기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건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점입니다. 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격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작가가 행해온 작업의 성과도 아니고 보상도 아닙니다. 하물며 결론 같은 것도 아니에요. 어떤 상이 그 자격을 어떤 형태로든 보강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작가에게는 '좋은 상'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혹은 도리어 방해물이 되고 성가심의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럽지만 '좋은 상'이라고 할 수 없다, 라는 얘기입니다. - 83~84p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와 문체가 필요합니다. 기성 작가들이 써먹지 않았을 만한 비이클=언어와 문체를 새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써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할 경우 시동이 걸리기까지 상당히 힘이 들지만 일단 비이클이 기동력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오히려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써야할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당신이 가진 것이 '경량급' 소재고 그 양이 한정적이라고 해도 조합 방식의 매직만 깨친다면 그야말로 얼마든지 스토리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 작업에 숙달된다면, 그리고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깜짝 놀랄 만큼 '무겁고 깊은 것'을 구축해나갈 수 있습니다." - 131~134p
나이가 들수록 체험이 부여해주는 다이너미즘은 역시 조금씩 저하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떤지는 물론 본인이 아니고서는 모를 일이지만, 헤밍웨이는 노벨 문학상을 타기는 했어도(1954년) 알코올에 빠져 1961년 명성의 절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 135~136p
일전에 <뉴욕 타임스>(2014/2/2)를 읽노라니 데뷔 당시의 비틀스에 대해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They produced a sound that was fresh, energetic and unmistakably their own. (그들이 창조해낸 사운드는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 나는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로 그러한 '심적인 상태'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멋진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난 것 같은 - 113p
한 문장을 수없이 다시 읽으면서 여운을 확인하고 말의 순서를 바꾸고 세세한 표현을 변경하는 등의 '망치질'을 나느 태생적으로 좋아합니다. ... 내가 경애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도 그런 '망치질'을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내고 그것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쉼표 몇 개를 삭제하고,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똑같은 자리에 다시 쉼표를 찍어 넣을 때, 나는 그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라고. - 163~164p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정보 과다라고 할까 짐이 너무 많다고 할까. 주어진 세세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태에 빠집니다. 그렇다면 우선 필요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 계통을 깨끗하게 해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것입니다.
...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애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혹은 자기 자신까지도-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 106~110p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된다 싶어도 어떻게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 그런 건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그래서야 공장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분명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소설가가 예술가가 아니어서는 안 되는가. 대체 누가 언제 그런 것을 정했는가. 아무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우선 '딱히 예술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 150p
내가 흐뭇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내 소설이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집은 삼대에 걸쳐 무라카미 씨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라는 편지가 이따금 날아옵니다. 할머니가 읽고(그녀는 나의 예전 '젊은 독자'였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가 읽고, 아들이 읽고, 그 여동생이 읽고. 그런 일이 아마도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정말 기분이 환해집니다. 한 권의 책을 한 지붕 아래 몇 사람이 돌아가며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 273~274p
삼십여년 전 봄날 오후에 진구 구장 외야석에서 내 손에 하늘하늘 떨어져 내려온 것의 감촉을 나는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그 일 년 뒤의 봄날 오후에 센다가야 초등학교 옆에서 주운 상처 입은 비둘기의 온기를 똑같이 내 손바닥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런 기억이 의미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터인 뭔가를 믿는 것이고, 그것이 키워낼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감촉이 나의 내부에 아직껏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 56~5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