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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Aug 30. 2021

척하는 책

별책부록 - 영화 속 책의 엉뚱한 쓸모3

"오~ 9년 전에 들고있던 책 또 들고 있는 것 봐. 이건 언제 다 읽는 거예요?"
"무릇 대장부란 같은 책을 백 번 읽고 백 번 쓰며…."
"오~ 거짓말하는 것 봐. 귀여워."
"(수줍) 다 티나?"


  2016년 말 방영한 TvN 드라마 <도깨비> 15화에서 김신(공유)은 지은탁(김고은)의 지적에 쑥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작품 설정상 도깨비인 신은 은탁이 입김으로 불을 끄면 소환되는데, 이따금 독서 중 불려온 듯한 자세를 취하곤 했다. 그 모습에 어릴 적 은탁은 신이 독서를 즐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신의 손에 들린 책은 바뀌지 않았다. 변한 것은 '도깨비 소녀' 은탁과 신의 서로를 향한 마음 뿐이다.

  한때 가여웠고 어느덧 사랑하게 된 은탁 앞에서 독서에 심취한 듯 연기하는 신의 새초롬한 표정은 시청자를 미소짓게 만든다. 호감가는 이성 앞에서 책을 들여다본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만큼 진지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탁월한 도구는 찾기 어렵다. 은탁은 고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모범생이니 신의 고민이 오죽 심했을까.

  결과적으로 연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신이 쏘아올린 화살은 엉뚱한 방식으로 은탁의 심장에 명중했다("귀여워"). 사랑의 힘은 그렇게 위대하다. <대장부의 삶>이란 책 제목까지 뛰어넘을 만큼. 이번 화에선 어떤 '척'에 쓰인 책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달 4일 개봉한 <수어사이드 스쿼드2>에서 돌연변이 상어 '킹 샤크'는 벨레브 교도소에 갇힌 흉악범이다. 아만다 월러 장관은 그를 포함한 복수의 악당들로 수어사이드 스쿼드라는 조직을 꾸리고자 한다. 악당은 과거 무찌를 대상이었으나 슈퍼맨 사후 상황이 달라졌다. 우주를 포함한 각지에서 메타 휴먼의 침공이 이어지면서 한 명의 특수 능력자라도 아쉬운 상황이 됐다. 장관은 총기 등 도구 사용에 능한 전직 용병 블러드스포트를 끌고 팀원들을 소개한다.

  블러드스포트가 킹 샤크를 처음 만난 순간, 누가봐도 상어의 모습인 그는 책을 보고 있다. 책은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다. 제목처럼 심오한 주제를 다룬 책이어서인지 킹 샤크의 표정은 사뭇 심각하다. 자칫하면 그가 진짜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할 정도다. 월러가 "상어 신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며 추켜세우지만 킹 샤크는 책을 거꾸로 들고 있다. 무식하단 사실을 감추고 싶어서인지, 인간과 다르다는 지적을 피하고 싶은 것인지 동기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그가 책을 들고 '읽는 척'한다는 사실이다.



  <어바웃타임>에서 영국인 팀(돔놀 글리슨)책으로 두근대는 마음을 숨긴다. 설정상 시간여행 능력을 가진 그는 방학 동안 콘월의 자택에 놀러온 런던 여성 샬롯(마고 로비)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녀의 시원한 이목구비와 쭉 뻗은 다리, 활달한 몸짓에 넋이 나가서일까. 잘 보이고픈 마음과 달리 팀의 행동은 실수연발이다. 선탠 오일을 발라달라는 샬롯의 청에 즉각 움직였다가 "잽싸기도 하다"는 빈축도 산다.

  기어코 샬롯의 등, 머리에 오일을 왕창 쏟은 그는 시간을 되돌려 샬롯의 부름이 시작된 순간으로 되돌아 간다. 그리고 샬롯의 호명에 천천히 응한다. "팀, 오일 좀 발라줄래?" "그래. 이것만 마저 읽고." 그를 기다리게 된 샬롯의 표정은  쑥쓰러운 듯 어색하다. 인기 많은 사람일수록 무관심한 상대에게 끌린다는("날 때린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 인터넷 소설 같은 컨셉이 성과를 거둔 것일까.



  심장뛰는 일이 사랑 뿐이겠는가. 지난 2월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SF 영화 <승리호>장선장(김태리)은 경찰 앞에서 침착한 척하는 데 책을 이용한다. 장선장 일당은 얼마 전 우연히 자신들의 우주선에 들어선 소녀를 어떻게 처리할 지 고민 중이다. 귀여운 외모의 소녀를 두고 일당은 '부모를 찾아주면 사례금을 주지 않을까' 고민하지만 이내 소녀가 수소폭탄을 내장한 안드로이드 로봇임을 알게 된다. 우주 개발 기업 UTS와 테러 단체 검은 여우단이 소녀를 찾는다는 소식에 일당은 큰 돈을 벌 궁리를 한다.

  호사다마일까. 때마침 경찰이 일당의 우주선에 도킹한다. 태호(송중기)는 기계를 고치는 척, 로봇 업동이(유해진)은 선내를 청소하는 척 한다. 수색하러 온 경찰이 이들의 행동을 의심하며 몇 가지 질문을 건네지만 장선장은 묵묵부답이다. 대신 그녀는 표지가 낡은 중국 무협지 <영웅문>에 눈길을 준다.



  <리플리>에서 책은 마음과 시선을 숨기는 도구다. 톰(맷 데이먼)은 이탈리아에서 친해진 디키(주드 로)와의 관계에서 점점 소외감을 느낀다. 톰은 부자인 데다 매력이 넘치는 디키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디키는 자신을 흉내내고 옷까지 몰래 입는 톰에게 싫증이 난 듯하다. 디키가 오랜 친구 프레디(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와 수영을 하는 동안 톰은 배 위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다.

  수영을 마친 후에도 디키는 톰에게 관심이 없다. 그의 당면 과제는 삐진 여자친구 마지(기네스 펠트로)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다. 디키 마지의 손을 배 아래 선실 향하자, 에 책을 쥔 톰이 슬며시 선실을 들여다 다. 디키와 마지의 다리가 엉키는 모습이 톰의 눈이 들어온다. 톰의 시선을 눈치챈 프레디가 한마디 한다. "훔쳐 보면 좋아?"



  범죄영화와 첩보물에도 책이 종종 나온다. 이 분야 고전으로 분류되는 <미션임파서블3>에서 책은 의심을 피하는 도구다. 주인공 이단 헌트(톰 크루즈)는 오웬 데이비언(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을 붙잡고자 바티칸에 간다. 오웬은 이단의 동료를 죽인 테러리스트로 바티칸에서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단은 출입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바티칸 성벽을 넘어간다. 그리고 사제복을 입은 채 바티칸 내부를 걷는다. 성경으로 보이는 책을 읽는 그의 존재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없다. 이단은 지나가는 신부와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나눈 뒤 본격적으로 납치 작전에 돌입한다.



  책을 쓰는 척 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 <미저리>에서 유명 작가 폴 쉘던(제임스 칸)은 다리가 부러지고 온 몸에 타박상을 입은 가운데 타자기를 두들긴다. 는 얼마 눈길에서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고 애니 윌킨스(캐시 베이츠)의 집에서 눈을 떴다. 애니는 폴의 대중 소설 '미저리'의 광팬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폴을 협박해 소설의 결말을 바꿔달라고 요구한다. 폴은 변화를 원치 않지만 애니의 요구를 거절했다간 폭행당해 죽을 지도 모른다. 생존을 꿈꾸는 폴은 쓰는 시늉을 하며 탈출의 기회를 엿본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샤이닝>에도 거짓으로 책을 집필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저리와 달리 이 영화에선 주인공이 쓰는 척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소설가 잭(잭 니콜슨)은 한겨울 가족을 데리고 어느 한적한 지역의 호텔 오버룩을 향한다. 호텔에 숙박하며 소설 집필에 열중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제대로된 글을 쓰지 않는다. 영화 말미, 아내가 잭의 타자기에서 찾아내는 글은 'all work no play makes Jack dull boy(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잭은 바보가 된다)'는 문장 뿐이다. 호텔에 수맥이라고 흐른 것일까.



  어떤 이는 책을 일부러 읽지 않는 척한다. 통일 전 서독 배경의 영화 <더 리더>에서 고등학생 마이클은 30대 버스 검표원 한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신이 빚은 듯 완벽한 외모의 그녀가 어쩌다 깡마르고 미성숙한 소년과 사랑을 나누게 됐는지 영화는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감독은 다만 "책을 읽어줘"라며 요구하는 한나와 '일리아스', '오딧세이' 등 고전을 읽어주는 마이클을 카메라에 담는다. 마이클이 한참 책을 읽으면, 한나는 '오늘은 여기까지'라며 책을 덮고 마이클과 사랑을 나눈다.

  어느 날인가 마이클은 한나에게 고트프리드 레싱의 작품 '에밀리아 갈로티'를 건넨다. 그녀가 직접 읽으면 더 좋아할 것이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한나는 마이클의 선물을 밀어내며 "네가 읽어줘"라고 말한다. 둘이 교외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시퀀스에도 비슷한 신이 나온다. 마이클이 '무엇을 먹겠냐'며 메뉴판을 들이대자 한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네가 시켜 같은 걸로 할게"라고 답한다. 여행 시작 전에도 한나는 마이클이 건넨 안내책자를 읽지 않고 던진 바 있다.

  이들 장면이 의미를 획득하는 건 영화 속 시간이 수십년 흐른 뒤, 한나가 '나치 부역자'로 재판을 받을 때다. 재판장은 나치에게 넘어간 유대인 명부의 필체와 한나의 글씨를 비교해보자고 제안한다. 모든 정황이 한나의 무죄를 가리키는 상황이라 글씨만 쓰면 한나는 누명을 벗을 수 있다. 하지만 한나는 재판장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를 지켜보던 마이클은 그제야 한나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처럼 마이클도 몰랐을 것이다. 사형수가 될지언정 문맹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는 것을, 어떤 사랑은 책을 읽어준다는 이유만으로 자란다는 것을.


 


  순간순간 용도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집>에서 초등학생 하나의 취미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것이다. 요리책을 좋아하지만 하나는 매일 싸우는 부모님이 이혼할까봐 걱정하며 서가에서 이혼 관련 서적('왜 더이상 함께 살 수 없어요?' 등)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가 도서관을 나설 때 그녀의 손에 들린 건 한아름 국내 여행책자 뿐이다. '이런 것도 읽냐'는 지아의 질문 때문일까. 지아는 별 의도가 없어 보이지만, 하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엉뚱한 책을 원하는 척한다.

  목표와 다른 책을 들고 왔지만 하나의 진심은 버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혼 걱정을 걷어내고 나니 아이의 소망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의 꿈은 부모님과 함께 가족여행을 떠나는 것, 이를 이룰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아이는 동네 친구 유미, 유진과 셋이 여행을 떠난다.

  마음에 맞는 책을 고르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지만, 때로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화살이 과녁에 정확히 꽂히기도 한다. 콘텍스트란 낱말이 발명된 것은 텍스트를 두고 나타나는 감정과 행위가 이토록 다양하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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