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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Sep 21. 2021

수수께끼의 '호밀밭'

스탠리 큐브릭, 『샤이닝』(1980)


*소설 『샤이닝』 및 영화 『샤이닝』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수께끼로서 『샤이닝』


스티븐 킹의 소설 『샤이닝』을 영화 『샤이닝』을 본 이후에 읽은 사람들은,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꽤나 까다로운 작품이라는 점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듀나의 말마따나 "인상적인 심상은 존재하지만 독자들을 공포와 연민으로 몰아가는 인간적 드라마 대부분은 이미지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영화가 짝사랑한 작가 스티븐 킹의 작품세계」, 『씨네21』, 2017.08.28)이다. 그 때문에 영화의 책임 프로듀서인 얀 할란(Jan Harlan)도 큐브릭이 이 소설을 극적으로 바꾸려 한다는 사실을 시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바꾸기 위해' 이 작품의 판권을 샀다. (『View from the Overlook: Crafting the Shining』, 2007)


영화는 교사이자 작가인 주인공 잭 토런스가 콜로라도의 외딴 산속에 있는 오버룩 호텔에서 겨울을 나면서 겪는 이야기라는 줄거리를 제외하면, 주인공의 전사(前史)를 보여주는 방식, 샤이닝 능력에 대한 설명, 토피어리와 할로런의 비중, 오버룩 호텔이 맞이하는 결말 등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다. 원작자를 화나게 만들었지만, 섬세하게 재배치된 사물은 영화를 자전적인 인간 찬가 대신 냉정하게 계산된 수수께끼로 만들었다. 그 덕에 영화가 말끝을 흐린 장면들을 마주하며, 우리는 대니처럼 미궁을 헤매게 된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기


큐브릭이 섬세하게 재배치한 사물 가운데에는 웬디도 있다. 특히 영화 초반부, 잭의 아내인 웬디 토런스가 아파트에서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아들 대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웬디를 위해 섬세하게 고안된 수수께끼다. 원작 소설에서 웬디는 책을 좋아하고 몇 권의 책을 작중에서 읽기도 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아니다. 게다가 호텔 내에서도 책을 읽는 원작과 달리, 자신의 아파트를 벗어난 이후 웬디는 책을 읽지 않는다. 웬디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제거된 영화에서,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다.


붉은 표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아마도 지금은 사라진 반탐 북스(Bantam Books)의 판본일 것이다.


책을 읽는 웬디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영화에 대한 분석이나, 엄밀한 비평이 되기엔 부족하다. 이것은 흔적 기관처럼 퇴화된 단편에 불과하며, 단편은 종종 영화와 다른 말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단편은 영화의 일부분이라기보다, 영화 바깥의 자율적 장면처럼 살아남아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을 해석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검토해보는 것은 유희적 측면에서도 즐겁지만, 동시에 이 장면이 영화 전체와 맺는 관계를 모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측면에서도 시도해볼 만한 것이다. 우리는 잭처럼 미로를 내려다보진 못하지만, 대니처럼 살아나갈 수는 있다.


첫 번째 다리 : 파수꾼


많은 감독들이 그러하듯, 영화 장면 안에 등장하는 책은 그 책을 들고 있는 인물의 성격이나, 그 인물에게 벌어질 사건, 혹은 영화 전체의 주제의식이나 사건의 전개를 암시하는 사물로서 기능한다. 특히나 원작 소설에도 없는 책을 감독이 인물의 손에 들려 보내는 세심함을 고려하면, 책은 분명 해석 놀이를 기다리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성적 때문에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다. 정해진 날짜보다 일찍 학교에서 짐을 싸서 나온 그는 뉴욕으로 떠나 사흘간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지만, 그곳에서 만난 위선자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소설은 결국 자신이 아끼던 동생 피비와 대화 끝에 콜필드가 집으로 돌아와 병원 치료를 받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것은 현실인가 가상인가, 순수인가 위선인가. 왜 그것은 잭이 아니라 웬디에게 들려 있는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호밀밭의 파수꾼은, 콜필드가 어린아이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오해한 것이지만 콜필드가 바라는 미래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어린아이들이 순수함을 잃고 가식과 위선을 떠는 어른으로 타락하기 전에 그들을 보호해주고 싶다는 의미로 보통 해석된다. 영화 속에서 잭과 호텔로부터 대니를 지켜내는 웬디의 미래를 도식적으로 대입해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이미 그렇게 보기로 했기 때문에 보이는 도식일 수도 있다. 홀든 콜필드와 잭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까? 웬디는 홀든 콜필드에 비해선 훨씬 책임감 넘치는 인물이지 않은가? 실제로 피비는 홀든의 대답을 듣고 그것이 진지한 생각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인 대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모든 것을 '그리움'의 대상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홀든이 웬디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하다. 게다가 그 외에 소설과 영화는 서로를 참조하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도 그 이후, 이 책을 참조하지 않는다!)


두 번째 다리 : 금서(禁書)


다른 다리를 건너볼 때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내용보다, 그 책이 당시 처해 있던 사회, 역사, 문화적 맥락을 따져보면 또 다른 징검다리가 하나 발견된다. 1951년 발표된 이 소설은, 1961년부터 1982년까지 무려 20년 간 미국 공립학교 및 도서관에서 1급 금서로 지정된 바 있다. 소설 속의 내용이나 문장이 저속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물론 '반체제적' 혹은 '공산주의자의 음모'와 같은 공격은 이 책에 대한 금지된 욕망을 자극하기도 했다.


국가가 금서로 지정하는 행위는, 일종의 필독도서 목록을 지정하는 행위와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는 시기 이 책은 여전히 금서였다. (영화가 개봉된 시기를 기준으로 해도 1980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좋지 않은 금서를 대니 앞에서 당당히 읽고 있다. 이것은 웬디의 왕성한 독서 욕구를 드러내는 장면인지도 모른다. 아파트엔 채 풀지 못한 박스들과 TV 주변에 탑처럼 쌓여있는 책들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웬디의 독서 욕구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동력이기도 하다. 가족의 '평온한' 일상은 글을 쓰고 있는 잭에게 웬디가 다가가 얼마나 글을 썼는지 물어보는 순간 깨진다. 잭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일견 피해망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현실과 가상을 구별할 토템이 없으므로, 단지 웬디가 남편이 써낼 위대한 희곡의 첫 독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상황을 어그러뜨리는 모습만을 볼 수 있다.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로 가득한 희곡(Play) 역시 잭의 책상으로 다가가는 웬디의 움직임 때문에 관객에게 알려진다.


어쨌든 웬디는 잭(Jack)이 만든 이 '위대한' 희곡(Play)의 첫 번째 독자다.


그녀는 오버룩 호텔에 들어선 후 잭에게 글을 언제부터 쓸 것인지 묻고, 얼마나 썼는지 묻고, 썼다면 보여달라고 묻는다. 영화 속에서 내내 지친 표정으로 울부짖는 웬디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에 어긋나는 순간들이 영화 초반부의 아파트 장면에 응축되어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 내용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속성으로 인해 배치된 사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여전히 왜 하필 수많은 금서들 가운데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고 읽었는지 묻는다면 말끝은 흐려진다.


세 번째 다리 : 자유


내용도, 맥락도 완전한 대답이 될 수 없다면 아예 들고 있는 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단편적 장면 자체가 영화 전체에 대립하여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물어보는 방식으로 우회할 수도 있다. 원작 소설에서 잭과 웬디는 모두 한 번씩은 책을 읽지만, 영화에서 온전한 독자는 오로지 웬디뿐임을 지적하면서 말이다. 잭이 물론 호텔 로비에서 잡지를 하나 읽고 있지만, 1978년 1월 『플레이걸』 잡지 정도는 아무리 책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심심풀이로 손에 들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물론 이것도 사려 깊은 배치일 것이다, 반대로 보면) 책은 오로지 웬디의 주변에서만 온전한 형태로 드러난다.


잭은 울먼이 오자 바로 잡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그가 '공들여'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웬디가 책을 읽고 있는 곳은 잭의 시선, 또는 잭을 불러들인 호텔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아파트다. 그곳에서 잭은 웬디와 통화만 가능하다. 이곳은 누군가의 시선에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웬디 고유의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라는 게 있다면)의 웬디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금서인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곳이 웬디에게 자유의 장소임을 드러내는 장치일 수 있다. 실제로 웬디의 자유는 잭과 호텔이 모두 파괴된 이후에야 얻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후 소설 속에서 그녀는 책을 읽는다.("여자는 손에 책을 들고서 현관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버룩 호텔의 대칭적 이미지와 대비되는, 흐트러지고 무질서한 아파트 공간은 웬디를 자유롭게 한다.


『샤이닝』이 웬디가 자유를 되찾는 과정을 따라가 보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면, 이런 단편적인 지점들을 징검다리 건너듯 짚어가는 방법을 통해서일 것이다. 여전히 의문은 있다. 영화 이후, 웬디는 과연 책을 읽었을까? 그녀는 마음의 안식과 자유를 되찾았을까? 왜 영화는 소설과 다르게 잭을 삼켜버린 차가운 호텔의 복도로 마무리짓는가? 영화는 이렇게 웬디에게도 말끝을 흐린다.


사실은... 잔도?


모든 다리가 이미 끊어져 있고, 이 모든 것들이 유령의 발걸음일지도 모른다. 맥거핀에 불과할 수도 있다. 혹은 깊은 고민 없이 빨간색 표지와 빨간 옷을 입은 웬디가 서로 어울릴 것 같아서 소품들 중 하나를 던져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일부러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물들을 주의 깊게 배치함으로써, 끊임없이 도전하게 만드는 답 없는 수수께끼를 내놓고 관객의 좌절을 즐기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예 그만둘 수는 없을 정도로 모호한 기울기로, 끊임없이 미끄러지지만 어딘가 고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내려놓기엔 다정한 방식으로 배치함으로써.


혹은 스탠리 큐브릭이 웬디 촬영분을 상당수 삭제하면서 - 각색을 담당한 다이앤 존슨은, 웬디 캐릭터에 관심이 많았는데 원래 각색본에서는 웬디의 말이 더 많았고, 배우의 연기에 대한 불만족으로 감독이 촬영분을 삭제한 경우들이 있었음을 기억했다(Diane Johnson, 「Writing the Shining」, 2006) - 웬디를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 흔적처럼 남아버려 해석의 빈 공간들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레디가 잭의 옷에 음료를 흘려 '얼룩'을 만들고, 화장실에서 대니(그리고 웬디)라는 '얼룩'을 지우는 호텔 관리인의 사명을 잭에게 일깨워주는 장면에서 큐브릭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 어쨌든 우리는 괘씸하지만, 끊임없이 영화라는 암벽을 미끄러지며 연신 캠을 박아보는 수밖에 없다. 어디가 걸맞은 곳인지 알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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