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문희 Jul 27. 2022

아내의 '유혹'

<나를 찾아줘>(2014), 데이비드 핀처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안 본 분은 조용히 뒤로...


  <나를 찾아줘>(2014)의 원제를 확인하고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Gone Girl'은 아무래도 '사라진 여자' 정도로 번역돼야 맞지 않나. 이 영화의 팽팽한 장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몇번을 되돌려 본 지금은 적절한 번역이었다고 끄덕인다. 저 말은 부탁이 아니라 유혹이고, 그 점에서 의미심장한 문장이라고.

  영화는 어느 방면으로 봐도 흥미진진하다. 아내가 단서를 남긴 채 실종된다는 중심 사건은 추리극의 전통에 맞닿고, 사건이 결혼 생활에 질린 아내의 자작극이었다는 반전은 강렬하다. 반전이 영화 중반부에 나타난다는 점은 파격이며, 자신이 누명씌운 남편에게 돌아오고자 다른 남성을 살해하는 여성에게선 범죄자의 이상심리가 읽힌다.



  여기까지만 해도 재미있는 영화지만, <나를 찾아줘>가 특별한 이유는 결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온다. 남편 닉이나 경찰, 그녀의 부모가 에이미를 찾아낸 것이 아니다. 그녀가 돌아오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온 이유는 그녀가 사라진 이유와 다르지 않다. 149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그 이유를 살피는 데에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이상한 여자를 관객이 납득할 수 있을까. 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영화가 나아가는 길목에 살포시 세 편의 텍스트와 한 권의 책을 놓는다.


닉과 에이미, 두 이야기의 각축


  영화의 큰 축경쟁하는 두 편의 이야기로 꾸려진다. 각각 이야기의 주연은 닉과 에이미다. 영화의 전반부 내내 두 주연의 이야기는 다르게 전개된다. 닉은 아내가 사라진 현재의 시점에서 조명된다. 그는 아내가 사라진 이유를 모르며 딱히 알고 싶은 것 같지도 않다. 에이미를 찾고자 경찰을 부르고 그녀의 부모에게 연락은 한다. 하지만 동생 마고에게 고백하듯 닉과 에이미의 결혼 생활은 사실상 파탄 지경이었고,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는 닉은 앤디라는 젊은 학생과 바람이 난 상태였다. 게다가 경찰은 닉의 집에서 살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도구를 찾아낸다. 그가 골프채, 전기 청소기 등 물건을 마구 사들여 재정난에 시달렸고 아내의 보험 증서에 사인했다는 증거도 그에게 불리한 정황이다.

  반면 실종된 에이미의 오늘은 그려지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이야기는 과거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감독은 그녀의 일기장 속 문장을 영상화한다. 그녀가 처음 닉을 만난 것은 7년 전이다. 그때 그들은 불꽃같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경제 위기가 닥쳐오면서 둘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뉴욕에 살던 그들이 닉의 고향 미주리로 이사가면서 갈등은 극에 달한다. 그녀는 닉의 불륜 사실을 안다. 향수를 뿌리고 집을 나서는 그를 막아서려다 폭행까지 당한다. 그녀는 닉이 언젠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다...


영화 <나를 찾아줘> 중 주인공 에이미의 일기장. 빨간 글씨로 "발렌타인데이에 나는 총을 사야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문장이 적혀 있다.


  둘 사이 대화를 제외한 에이미의 내면은 그녀의 내레이션으로 나타난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이렇게 쓴다. "관객은 닉의 이야기와 에이미의 이야기 중에서 자연스럽게 후자를 더 신뢰하게 된다. ... 상충하는 두 이야기 사이에 놓인 청자는 절절한 심리를 담아낸 주관적 설명과 역사를 끌어들여 술회하는 서술 방식을 지닌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명민한 핀처가 영화의 내용이 아닌 화법으로 운동장을 기울여 놨다는 뜻이다. 과거 장면을 끼워넣는 영화 기법인 '플래시백'은 특정 인물의 사연을 부각해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데 유용하관객은 내레이션의 화자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닉은 자신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경찰 론다와 그녀의 부하직원처럼 관객도 그의 말을 의심하게 되는 이유다.


<어메이징 에이미>와 에이미의 대결


  관객의 시선이 뒤집히는 건 영화 중반부쯤, 현재 시점의 에이미가 화면에 등장하면서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던 그녀는 멀쩡히 생존한 채 차량을 운전하고 있다. 그녀는 닉과 자신의 결혼 생활이 엉망이었다고 회고한다. 닉이 점차 폭력적인 남편으로 변화했다는 그녀의 일기는 에이미가 꾸며낸 것으로 드러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차라리 죽어서, 닉을 아내 살인범으로 만들겠다'는 그녀의 복수심은 분명하다. 경찰이 살해 도구와 정황 증거를 찾아낼 수 있게끔 정교하게 트릭을 고안한 그녀는 이제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타임라인을 달력에 차곡차곡 기록한다.



  이 복수심의 연원에 핀처는 한 편의 텍스트를 배치한다. 에이미의 부모가 쓴 베스트셀러 시리즈 <어메이징 에이미>가 그것이다. 에이미는 평생 '어메이징 에이미'에게 시달리며 살았다. 어메이징 에이미의 결혼 축하 파티가 열린 날, 닉과 함께 부모를 만난 에이미는 말한다. "나는 10살때 첼로 그만뒀는데 쟤는 다음 책에서 첼로 신동이 됐어." 닉과의 결혼 이전까지 그녀의 일기장은 어메이징 에이미에 대한 불평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실종 사건 7년 전, 닉과 처음 만난 날부터 무언가 조금씩 달라졌다. 파티에서 '당신은 자체로 완벽하다'고 청혼하는 그를 보며 에이미는 생각한다. "그 순간부터 그날 밤이 더이상 끔찍하지 않았다." 복수심의 기원에는 닉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란 기대가 놓였던 것이다.

  하지만 결혼 이후의 삶은 실망이 컸다. 닉은 게을렀고,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닉은 나를 사랑한적이 없어. 내가 연기한 여자를 사랑했지"라고 말한다. 부모가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굴레를 그녀에게 씌운 것과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다. 에이미는 차라리 '폭력적인 남편을 만난 희생자'로 자신을 꾸며내고자 한다. 비극이지만, 적어도 이것은 남이 아닌 자신이 쓴 이야기다. 그녀는 자기 삶의 저자가 자신이기를 희망한다.



닉의 전투, 에이미의 전쟁


  핀처는 영화 안에도 관객을 둔다. 닉과 에이미를 조명하는 미디어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청자가 그들이다. 관객들은 반전이 드러나는 중반 이후까지도 에이미의 실체를 모른다. 그녀가 꾸며낸 흔적을 토대로 닉을 의심할 뿐이다. 에이미 수색을 돕는 시민들의 봉사활동 현장에서 웃음을 보이고 여성들에게 친절한 닉의 행동도 '아내 살인범'이라는 의혹의 근거로 작용하는데, 이 또한 에이미의 계산에 이미 포함된 것이다(내내 멍한 표정에 일견 덜떨어져 보이는 벤 에플렉의 연기도 한 몫 한다). 닉이 이 게임의 정체를 깨닫는 것은 영화가 한참 진행된 후다. 변호사 태너 볼트는 그에게 말한다. "이 사건에선 여론이 제일 중요해요. 대중이 당신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해요." 과거와 현재로 불리하게 진행된 영화 전반부와 달리, 이제 에이미와 닉의 경쟁은 미디어를 상대로 누가 더 설득력을 갖는지 여부로 전환된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전 남친 데지 콜린스의 집에서 에이미는 닉이 출연한 방송을 본다. 탈출구로 그를 찾기는 했지만 머리를 바꿔라, 옷을 이렇게 입어라 지시하는 데지에게 에이미는 이미 질린 표정이다. '다 내 잘못'이라며 사랑을 청하는 닉의 모습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겠다던 예전의 그와 닮았다. TV를 들여다 보는 에이미의 위치도 실은 관객과 다르지 않다. 에이미는 마음을 바꾸고, 데지에서 탈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차곡차곡, 데지가 자신을 강간했다는 증거를 쌓은 뒤 그를 살해하는 것으로.



  데지를 살해한 후 피칠갑이 된 채 에이미는 돌아온다. 닉은 그녀가 데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안다. 자신에게 아내 살인범의 누명을 씌우려고 그녀가 기획했다는 것도. 하지만 누가 그의 말을 믿어줄까. "납치돼 강간당한, 그러나 끝내 돌아온 부인을 버리는 남자가 되고 싶어?" 에이미는 아내 귀환 서사에 열광하는 미디어와 대중 앞에서 활짝 웃으며 행복한 부부를 연기한다. 그리고 닉에게 말한다. "내 뺨에 키스해." 수사한 경찰도 변호사도 그들 사건의 진상을 알지만 대중에게 밝히지 못한다. 진실보다 진실 같은 이야기가 강하다는 냉소가 이야기의 결말일까.


해방의 서사


  영화에는 단 한 번, 한 권의 책이 등장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이다. 닉이 에이미와 행복했던 신혼 시절, 도서관에서 찾아내는 책이다. 결혼 기념일마다 에이미는 이벤트 차원에서 뉴욕의 곳곳에 '단서'를 숨겨뒀다. 닉이 단서를 하나씩 찾아 결말에 이르면, 둘은 화끈한 섹스로 사랑을 확인한다. "'오만과 편견' 주인공한테 동질감을 느꼈었군." 소설의 메시지는 가문의 부 같은 외적 조건보다 애정과 상호존중 같은 내적 가치가 결혼에서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닉 앞에서 에이미가 가진 사랑의 자세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에이미는 둘의 단서 찾기 게임을 훗날 실종 사건에 이용한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닉과 경찰이 찾아헤매다, 단서를 찾아낸 곳에서 여성의 빨간 팬티 등 닉에게 불리한 증거가 나타나도록 설계한 것이다. 둘 사이 사랑의 게임은 이쯤에선 껍데기만 남은 상태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게임의 시초엔 하나의 단서만으로 자신의 다음 단서를 찾아주기를, 닉이 끝내 자신의 마음에 닿기를 바란 에이미의 소망이 담겨있지 않았나. 그 점에서 "나를 찾아줘"라는 말유혹다. 말의 형식은 부탁이지만, 나아갈 길을 예비해둔 것은 유혹의 주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닉은 말한다. "(예전에) 난 널 사랑했어. 그 다음엔, 우리는 상대에게 분노했고 서로를 휘두르려 했지. 서로에게 고통을 안겨줬어." 절규하는 그에게 에이미는 답한다. "그게 결혼이야(That's marriage)!" '서로'라는 말을 쓰지만 이야기의 힘이 더 센 쪽은 에이미이다. 그것은 에이미가 자신의 삶에서 저자가 되려는 열망이 닉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억압받았던 기억에 몸서리쳐 본 사람은 안다. 에이미가 말하듯, 그녀는 "전사"다.

  이제 닉은 그녀의 이야기가 가진 자장 안에서 꽤 중요한, 그러나 여전히 등장인물인 상태로만 자신의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다. 어쩌면 살해당한 데지보다 더 비참한 결말이지만, 누가 알까. 닉이 에이미를 거부하며 자기 서사의 주인공으로 일어나게 될지.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미는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내게 <나를 찾아줘>는 주체가 되려는 이들의 몸부림으로 읽힌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수께끼의 '호밀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