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텔레비전을 보다 문득 슬펐던 기억이 난다. 한 아버지가 양손에 딸 사진을 든 모습이 뉴스 화면에 보였다. 고 이예람 중사의 아버지였다. 날짜를 기억하는 건 그날이 정치부에 배치된 첫날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부에서 쓴 마지막 기사는 곽상도 국민의힘 의원과 아들 곽병채씨를 다룬 것이었다. “군 수사를 믿지 못하겠다”며 울먹이는 이 중사 아버지의 말은 기사에 담지 못했다.
인사발령이 아니었다면 이 중사 부친의 회견도 썼을 것이다. ‘도’라는 보조사를 썼지만 두 사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둘 중 기사가 필요한 사람은 후자였다. 지난 5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이 중사는 상관의 성추행 사실을 여러차례 알렸다. 하지만 군당국의 수사는 없었고, 가해자 주변 군 관계자들로부터 회유·협박 등 2차 피해만 당했다. 수사가 시작된 것은 이 중사가 사망한 뒤 올라온 국민청원 덕분이었다. 지금도 이 중사의 유족은 시민단체의 조력을 받아 겨우 사건에 대응하고 있다.
국회의원 아버지를 둔 곽씨의 상황은 이 중사와 달랐다. 화천대유자산관리에서 50억 퇴직금을 수령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당일 곽씨가 입장문을 내놓은 곳은 부친의 페이스북이었다. “저는 치밀하게 설계된 <오징어게임> 속 ‘말’일 뿐”이라는 그의 해명은 국회의원의 SNS에 올라온 만큼 발 빠르게 퍼졌다. 화천대유 측도 나서서 곽씨에게 지급한 돈이 산재 위로금 성격이라고 설명했다.
곽씨의 입장문을 보며 대학 때 배운 구조와 행위자 개념을 생각했다. 구조를 강조하는 이들은 사회나 집단의 규칙·관행 앞에 개인을 무력한 존재로 그린다. 반면 개인에겐 늘 선택의 여지가 있다며 행위자에 주목하는 학파도 있다. 학부 수업 땐 ‘둘 다 중요하다’며 어설프게 논쟁을 끝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다시 토론한다면 ‘처지마다 다르다’고 할 것 같다. 생전 “나 이렇게 힘들게 한 사람 그냥 안 둘 거야”라며 괴로움을 호소하는 딸에게 이 중사 어머니는 “항상 뜻이 맞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직장생활은 다 그러니 참으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곽 의원도 아들에게 ‘참으라’고 했을까.
곽씨가 자신을 빗댄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가면을 쓴 요원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들은 모두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삶의 벼랑 끝에 서 계신 분들입니다.” ‘지면 죽는다’는 규칙을 듣고 참가자들은 탈출을 원한다. 정작 게임이 중단돼 밖에 나가자 스스로 게임장에 돌아온다. 요원의 말처럼 바깥도 이미 벼랑이었기 때문이다. 목숨까지 걸지 않아도 적당히 살아갈 수 있다는 선택지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대신 싸워주거나 탈출을 도울 부모도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얻은 정보로 기업에 지원하면서 “한 번 베팅해볼 만하겠다고 판단했다”는 곽씨에겐 너무 먼 풍경일 것이다.
‘금수저’로 태어난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저 세상 비극을 자기 일인 양 말하는 태도엔 신물이 난다. 곽씨가 사는 세상에서는 ‘오징어게임’이 벌어지지 않는다. 박완서 선생이 소설 <도둑맞은 가난>을 발표한 때가 1975년이다. 이젠 ‘도둑맞은 오징어’라도 써야 하나.
네티즌들이 공유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패러디. 최근 국민의힘을 탈당한 곽상도 의원과 그의 아들 곽병채씨(하단 오른쪽) 사진을 '오십억 게임'이라는 글자와 합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