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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Sep 22. 2022

나는 허세를 비웃지 않는다

장 뤽 고다르를 보내며


변변한 취향 하나 없던 20대 신새벽에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며 받은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장근석이 싸이월드에 쓴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먼저 봤는지, 고다르 영화를 본 뒤 근석군의 게시물을 마주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그냥, 모든 게 다 멋있었다. 누가 취미를 물으면 '영화 감상'이라고 답했다. 좋아하는 영화를 물으면 '고다르 알아?'라고 반문했다.


허세였다. 점프컷 등 기법이나 누벨바그 같은 사조를 배운 것 먼 나중 일이었다. 뭔지도 모른 채 감탄하며 밤을 채웠고, 낮시간은 젠체하며 보냈다. 영 느낌 안오는 영화의 이름을 '최고작'이라는 둥 떠벌였다. 잡지 <키노>와 영화 <키즈 리턴>을 말하는 영화 동아리의 친구 앞에서 주눅들기 싫었다. 그 친구가 몇 마디 더 지 않아서 망정이지, 뽀록났다면 얼마나 민망했을까. 내용물은 없이 거품만 가득한 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무용한 날들이 나를 키웠다. 아는 척 떠든 대낮의 말이 부끄러워 밤새도록 영화를 봤다. 정성일, 허문영 같은 비평가와 이동진, 김혜리 등 기자들의 글을 찾아 더듬더듬 읽었다. 영상자료와 텍스트를 오가며 영화 촬영과 편집 기법을 엿봤다. 그러다 20대를 마무리할 무렵 한 방송사의 시사교양 PD가 됐다. 기자로 업을 바꾼 지금도 누군가 취미를 물으면 영화 감상과 독서라고 답한다.


나는 허세를 비웃지 않는다. 기원과 개념을 몰라도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다. 고다르가 내게 알려준 삶의 비밀이다.


2022년 9월13일(날짜나 시간을 쓰는 건 왕가위의 영향인가), 장 뤽 고다르의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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