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학준 May 11. 2023

막장드라마도 당신을 본다

23.05.11. 프랑수아 오종, 인 더 하우스

* 영화 <인 더 하우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요새 대학원에서 드라마 비평 수업을 듣는데 수업이 끝나고 난 날에는 꼭 수업에서 다뤘던 작품을 같이 본다. 최근엔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 수업을 듣고 나서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와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집의 성>을 봤고 - 반 세기나 지났고 내용마저 모두 아는데도 긴장감이 상당했다 - 조만간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볼 예정이다. 오늘은 프랑수아 오종의 <인 더 하우스>를 함께 봤다. 원작은 스페인의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가 2000년에 쓴 희곡 <맨 끝 줄 소년>이다. 이를 각색한 <인 더 하우스>는 2012년, 한국에서는 연극으로 2015년에 <맨 끝 줄 소년>이란 이름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교사를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시선을 내 주지 않으면서도 모든 곳에 시선을 내던질 수 있는 교실 맨 끝 줄에 앉은 학생 클로드가 만들어 낸 이야기에, 모두를 내려다 보지만 동시에 모두의 시선에 노출된 교사 제르망이 매혹되어 끝내 파멸하고 마는 이야기다. 소설도 집필했지만 작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문학 교사인 제르망은 주말에 있었던 일에 대해 써 내는 과제를 채점하다 한 학생의 글에 이끌린다. 아슬아슬한 욕망으로 가득한 글에 매료된 그는 아내인 장의 우려를 무릅쓰고 그의 글쓰기를 돕는다. 


제르망은 자신이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줄 것 같은 클로드를 도구로 삼아, 매혹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서 쓰게 독려한다. 하지만 제르망은 자신이 클로드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클로드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 매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대가를 치른다. 제르망이 클로드를 통해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클로드가 제르망의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깨닫는다.


나만 볼 수 있다면, 당신은 펼쳐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클로드는 영민하다. 제르망이 장의 조언을 따라 글의 수준이 아닌 글의 내용과 윤리를 점잖게 꾸짖을 때, 클로드는 이렇게 대꾸한다. "다른 사람이 읽었나요? ... 선생님만 보시라고 쓴 건데."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당신만 볼 수 있다면, 그 내용이 조금 위험한들 무슨 상관일까? 그저, 이야기일 뿐인데. 흥미로운 이야기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욕망에 제르망은 흔들린다. 그는 아내의 조언을 포기하고, 자신이 처음 매혹되었던 에로틱한 이야기를 쓰도록 지도한다.


클로드가 더 이야기를 잘 쓰기 위해선 라파가 수학 과목에서 낙제를 받으면 안 된다고 하자 - 클로드가 라파의 집으로 간 구실이 라파의 수학 과외였다 - 제르망은 교사로서 해선 안 되는 일을 저지른다. 장은 그 사실을 알고 비난하지만, 제르망에게 더 중요한 것은 클로드의 생생한 글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저지른 죄가 클로드의 글 위에 드러나고 있음에도. 그에게 클로드의 글은 섹스보다 에로틱했다. "클로드 글쓰기 도와준 후로 우리 섹스 안 했어." 


직접적인 섹스 대신, 클로드의 글쓰기를 더욱 자극적으로 쓰게 만들면서 제르망은 대리 만족을 느낀다.


클로드의 글을 고치며 제르망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건네준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사실적으로 이야기 속 가정의 빈틈을 찾아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이 두꺼운 것을 언제 다 읽냐는 클로드의 말에 제르망은 "재미없으면 돌려주면 되지."라고 무심히 대답한다. 그리고 클로드는 자신의 다음 이야기를 건네며 "재미없으면 돌려주세요"라고 말한다. 그 뒤로 제르망은 클로드의 글을 되돌려주지 못한다.


문학 교사로서 제르망은 클로드에게 문학 작품의 작법들에 대해 가르친다. 독자는 누구인지 명확히 할 것, 귀스타브 플로베르(클로드와 제르망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이름이기도 하다)처럼 인물을 냉정하게 볼 것,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역경과 극복의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할 것, 의외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결론에 도달할 것 등. 그와 동시에 클로드에게 여러 권의 책들을 빌려준다. 안톤 체호프, 찰스 디킨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책들을. (체호프와 디킨스의 책이 무엇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마담 보바리>만큼은 확실힌 언급한다)



소설들을 건네주며, 라파 가족의 틈을 비집고, 벌리라고 독려하며 수업하는 제르망의 행동엔 맹점이 있다. 적어도 자신과 장 사이엔 그런 틈이 없을 거라는 착각. 그렇기에 그는 관음에 몰두할 수 있다. 하지만 장이 운영하는 갤러리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은 라파가 '성인용품점'이라 부를 정도로 성적 상징물들로 가득하다. 제르망이 침대 위에서 읽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은 장과 제르망의 벌어진 틈을 암시한다. (클로드는 제르망이 아이가 없는 이유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에서 이를 확신한다)


물론 이것은 오로지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족을 흥미로운 문학적 소재로 만드는 데 심리적 거부감이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도살장에 끌려가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 대부분은 도살장 앞에서 자신의 이마에 총구가 겨눠진 후에야 이 모든 것이 내가 만든 함정이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그렇게 제르망은 자기의 목을 죄어오는 이야기를 더욱 더 막장으로 이끌어간다.


제르망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클로드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클로드에게 끊임없이 드러냈으니까.


관음의 주체일 때라면 흥미롭지만, 자신이 대상이 되면 끔찍한 것이 바로 이야기다. 제르망은 자기가 언제나 쓰는 사람의 자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심지어 그의 곁에서 모두가 떠나고 오직 클로드만이 돌아와 앉았을 때에도. 제르망은 자신을 파멸시킨 (물론 그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겠으나) 클로드를 보고도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아파트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다른 집들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또 다시 독자의 입장에서 즐길 수 있다는 기대에 미소짓는다. 그 웃음은 그런데, 화면 너머의 우리에게도 향하는 것은 아닌가?


제르망이 파산에 이르는 데엔 그가 현실보다 이야기에 더 끌렸던 것도 한 몫을 한다. 제르망은 장에게 직접 물어보는 대신, 장과 클로드가 정사를 치른듯 한 암시로 가득한 글을 보고 목을 조르다 기절한다. 제르망은 라파나 그의 아버지에게 사과하는 대신에, 매혹적인 이야기를 얻기 위해 라파의 가족을 더욱 더 뒤흔들라고 클로드를 독려한다. 만약 그가 사과했다면, 그래서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가, 그를 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 들였다고?"의 목적어는 클로드인가, 플로베르인가.


그가 클로드의 이야기를 받으면서 빌려준 플로베르의 <순박한 마음>은 다시 장의 손으로 스스로에게 건네진다. 그가 이 소설을 클로드에게 빌려주면서, 에스더가 인생 전부를 희생한 소설 속 주인공 펠리시테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해 결단을 내리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정작 그녀에게 자신을 투영한 것은 제르망의 아내 장이었다. 영화는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의 가족이 누군가의 재미있는 이야기일 때, 당신은 여전히 이야기를 사랑할 수 있느냐고. 당신이 막장 드라마를 보며 웃는 동안, 막장 드라마도 당신을 보며 웃는다.


당신이 이야기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라는 '의외'의 결론이지만 다른 대안은 없다.


"제르망을 처음 만난 순간 어떻게 사는지 정말 궁금했다. 어떤 집에 사는지, 부인은 어떤지, 뭐를 하는지, 아이들은 있는지, 아직도 서로 사랑하는지..." 카메라가 잠든 장의 몸을 - 에스더를 바라보는 시선과 똑같이 - 훝으며 지나가는 이 대사는, 독자를 마주한 이야기의 시선과 이야기의 욕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에로틱하여 벗어날 도리가 없다. 우리는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이야기를 탐닉한다. "성공적 엔딩은 이런 느낌을 줘야 돼. '의외의 결론이지만 다른 대안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허세를 비웃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