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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l 08. 2023

문학의 한계

스티븐 달드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

* 스티븐 달드리의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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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던 어느 날, 고등학생인 마이클은 갑작스러운 구토감에 못이겨 전차에서 내린다. 입을 막아도 흘러나오는 토사물은 빗물과 뒤범벅되어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간신히 몸을 가누던 찰나, 집으로 들어오던 한나와 마주친다. 그녀는 능숙하게 양동이에 물을 채워 출입구를 씻어내고 마이클을 따뜻한 물에 씻긴다. 한나 덕분에 마이클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몇 달 후 병세가 잦아들자 감사의 인사를 건네러 그녀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 날부터 한나와 마이클의 삶은 그 때부터 돌이킬 수 없이 뒤엉킨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상관없었다. 마이클은 은근히 집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었고, 한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 격정적인 정사가 끝나면 한나는 마이클에게 책을 읽어달라 부탁했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 한나는 책을 먼저 읽자고 제안한다. 마이클은 감정을 담아 낭독한다. 오디세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전쟁과 평화, 채털리 부인의 여인... 여행과 연애(연애도 여행의 일종일 수 있다)소설들이 그들의 사이를 단단히 묶었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 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마이클은 문학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다. 시작은 섹스를 위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그 순서가 뒤바뀐 후부터 문학은 두 사람을 묶어주는 강력한 끈처럼 작동했다. 마이클이 읽는 글에 한나는 울고, 웃고, 화내고, 초조해했다. 낭독과 감상의 시간은 서로의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 시간을 끝없이 늘리고 싶었던 마이클은 계속 책을 읽었다. 소설의 목록은 무한하니, 그들의 동행도 영원하리라. 하지만 오디세이의 마지막은 여행의 종말이지 않았는가?


계절보다 짧은 순간이었다. 두 사람을 묶어주던 책들은 아지랑이에 불과했다. 몇 번의 다툼이 있었다. 한나는 괴팍하고 상대방의 의도에 둔감한 사람이었다. 전차에서 검표 업무를 하는 한나를 만나기 위해 전차에 오른 마이클이 바로 자기에게 오지 않고 다른 칸에 탔다는 이유로 끝까지 마이클을 무시하고, 은밀하고 달콤한 만남을 꿈꾸며 뒷칸에 올랐다며 항변하는 마이클의 호소에도 아랑곳 않고 방을 떠나길 요구한다. 마이클이 스스로 비굴해지면서 사랑을 갈구하지 않았다면, 사랑의 계절은 더욱 짧았을 것이다.


전차 바퀴가 내는 소리처럼 삐걱거리는 와중에도 마이클은 한나를 더욱 깊게 알아가고 싶었지만, 한나의 과거를 열어보는 데엔 실패했다. 그녀는 중요한 순간마다 회피하고, 자신을 알아가려는 마이클에게 날선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한나는 마이클이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에 사라졌다. 상실을 상상할 수 없었던 때에, 한나는 처음 만났던 날처럼 마이클을 씻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문학 작품을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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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이 한나를 다시 만난 곳은 전범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재판장에서였다. 로스쿨 학생이 된 마이클은 세미나를 위해 전범 재판을 참관하던 중, 피고인 자리에 있는 한나를 발견한다. 한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로 보낼 인원을 선발하는 데 참여한 혐의와, 수감자들의 행군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교회의 문을 열지 않아 수용자들의 목숨을 빼앗은 혐의로 기소된 상태였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이었음을 깨달은 마이클은 혼란스럽다.


그녀를 기소한 것은, 그녀가 읽지 못하는 책이었다. 문학이 될 수 없는 지옥의 경험을 '문학적'으로 서술한.


재판 과정에서 마이클은 한나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게 잔혹한 범죄를 주동한 죄를 뒤집어쓰는 것보다 그녀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필체를 검증하길 거부하고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자신이 썼다고 거짓으로 자백한다. 그 결과 그녀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마이클은 한나의 죄를 덜어줄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끝내 재판장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자신이 나치와 사랑을 나눴다는 데에서 온 부끄러움, 수용소로 보낸 아이들처럼 자신도 그녀에게 버림받은 존재였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배신감 때문이었을까?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할지를 법학과 교수(소설에서는 철학 교수인 아버지)에게 물으며 자신은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다고 항변하자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 전혀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것은 뭘 하느냐야. 자네같은 젊은이들이 과거에 배우는 게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마이클은 진실을 법정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모든 이들로부터 손가락질받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보일지라도. 하지만 진실을 알리는 것은 자신이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지키고 싶어하는 그 부끄러운 밑바닥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짓이다. "그녀에게 장래의 삶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그녀에게서 그녀의 평생 거짓말을 앗아버릴 수 있는가?" 마이클은 한나가 수용된 교도소로 면회를 왔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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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마이클은 로스쿨 동기인 거트루드와 결혼을 한다. 딸도 생겼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이혼을 한다. 마이클의 모든 순간에 한나가 끼어들었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한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딸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빈 집을 정리하던 마이클은 자신이 한나에게 읽어주었던 책의 목록을 발견한다. 그리고 오래된 녹음기를 꺼내 오디세이부터 다시 테이프에 담기 시작한다.


편지는 없이, 카세트 플레이어와 녹음된 오디세이가 한나에게 배달된다. 한나는 그의 녹음된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어느새 과거의 다정했던 한 때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제서야 도서관으로 간다.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연인을 빌려 글을 익히기 시작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마이클에게 짧은 편지를 보낸다. "마지막 책 고마워 꼬마야. 정말 좋았어." 그가 '문학'에 걸었던 기대가 응답을 받은 것일까? 소설에서는 그의 표정이 기쁨으로 가득했다고 묘사되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편지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당혹스러워한다.


영화는 아렌트의 책을 빼고, 체호프의 책을 포함시켰다. 한나가 스스로를 죄악을 대면하는 용도가 아니라, 아름다웠던 과거를 대면하는 용도로서.


두 번째 배반이 이루어진다. 모범수로서 20년만에 석방의 기회를 맞이한 한나는 사회에 돌아갈 곳이 없다. 유일하게 그녀와 연락을 주고 받은 것은 마이클이다. 마이클은 한나를 다시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길 부담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녀는 감옥에서 글을 배웠고, 문학 작품을 읽었다.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마이클은 교도소로 향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묻는다.


마이클 : 옛날 생각 많이 했어요?
한나 : 너랑 함께 한 시절?
마이클 : 아뇨. 아뇨. 나랑 함께 할 때 말고요.
한나 : 재판 전에는 한 번도 옛날 생각 안 했어. 생각할 필요가 없었지.
마이클 : 지금은요? 지금은 기분이 어때요?
한나 : 내 기분은 중요하지 않아. 내 생각도 중요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죽은 거니까.
마이클 : 아무 것도 배운 게 없군요.
한나 : 배웠어, 꼬마야. 읽는 법을 배웠지.


마이클은 절망한다. 그녀는 읽는 법을 배웠지만 자신의 과거를 읽는 일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라며 자신의 과거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기를 끝내 거부했다. 그의 목소리로 녹음하여 전달한 문학작품들은 그녀의 완강한 거부 앞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사랑했던 마이클과의 관계만을 생각하며 무언가를 읽었을 뿐이었다.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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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영화와 사뭇 다르다. 영화 속에서 한나는 마이클이 자신을 위한 자리를 마음 어디에도 두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가 스스로 목을 매기 위해 발을 디디려 쌓아올린 책들은 오디세이, 전쟁과 평화, 릴케의 시집과 같이 그와 그녀를 단단히 묶어주던 것들이다. 그녀가 자신의 과거와 직면하려 노력했는지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마이클은 한나의 책꽂이를 훑는다.


영화는 한나가 보는 책들을 마이클과 만나던 순간에만 고정시킨다. 이것은 소설과 영화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나는 책꽂이 앞으로 다가갔다. 프리모 레비, 엘리 비젤, 타데우시 보로프스키, 장 아메리 등 희생자들이 쓴 글과, 그 옆에는 루돌프 회스가 쓴 자서전적인 글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 그리고 강제 수용소에 대한 학술적인 글들이 있었다."


소설 속에서 한나는 글을 익힌 후 자신이 저지른 죄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데 남은 시간을 썼다. 자신을 가꾸는 것도 포기하고 고립을 자처했다. 한나의 죽음 이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이클은, 한나의 마지막 반성이 피해자에게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교회 화재의 생존자를 찾아 뉴욕으로 향한다. 비록 생존자는 그녀를 면죄하긴 거부했지만, 무지의 상태에 놓여 악을 행할 이들을 구해낼 문맹 퇴치 단체에 한나의 마지막 돈을 한나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데에는 동의했다.


이 맥락이 사라졌기에, 영화의 결말 부분은 버석거린다. 한나의 죽음이 반성으로 이해되려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장면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야 한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가 불편한 만남을 감수한 마이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게 없다면 읽는 법은 그저 과거(너랑 함께 한 시절)을 회복하려는 무의미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감독이 원하는 것은 홀로코스트의 이야기를 살짝 벗어나 끝내 자기 중심적으로 선택하는 한나와 상처받고도 그녀를 이해하려는 마이클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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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사람들은 무지와 악행을 곧바로 연결시킨다. 자기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돌아보지 못했던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인도했다. 저지른 죄보다 큰 벌을 억울하게 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녀의 행동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리뷰들에는 생각하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흔히 달라붙는다. 


"그러니까 저는 ...... 제 말은 ......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나는 진심에서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은 재판장에게 그 같으면 어떻게 행동했겠는지 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 작품을 전쟁을 겪은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 사이의 갈등, 전후 세대가 전쟁에 동조한 후에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보내는 도덕적 메시지(성실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았습니까? 성실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 아닙니까? 침묵은 죄가 될 수 없습니까? 법에 적혀있지 않은 것이라면 죄가 되지 않습니까? 단죄가 없는 법이란 무엇입니까?)로만 읽기엔 아쉽다. 


나는 당시에 <오디세이아>를 다시 읽었다. 나는 <오디세이아>를 학교 다닐 때 처음으로 읽었으며 그것을 하나의 귀향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귀향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결코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귀향을 믿겠는가. 오디세우스는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 귀향하는 것이다. <오디세이아>는 목표점이 확실하면서도 목표점이 없는, 성공적이면서도 헛된 운동의 이야기이다. 법률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도 하고 있는 것 같다. 문학의 한계는 어디에 그어지느냐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최초에 그녀가 글을 깨우치지 못한 이유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후에도 글을 깨우치려 하기보다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벌이는 일들이 잔혹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마이클은 혼잣말을 이렇게 내뱉는다.


"그녀를 억압하고 마비시켜 제대로 몸을 펼 수 없게 만든 이 거짓된 자기 이미지를 통해서 그녀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거짓된 자기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동원한 열정 정도라면 이미 오래전에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 무지하고자 하는 한나에게, 마이클은 낭독이라는 끈을 두 번 던졌다. 한 번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영원한 관계를 꿈꾸면서 다른 한 번은 그녀 자신의 과거와의 대면을 꿈꾸면서. 한나에게 낭독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불과했다. 글을 읽을 수는 없지만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아는 수용소의 꼬마들을 죽음의 길로 보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이클도 그렇게 버려졌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글을 배우는 행위도 자신을 사랑했던 마이클과의 추억을 붙잡기 위한 목적에 가까웠다. 그러니 한나에게 '문학'이란 무엇이었을까? 글을 깨우치기 전까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도 탐하고자 했던 욕망이었으며, 글을 깨우친 후에는 사랑했던 마이클과의 한 때로 되돌아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한 번도 그것이 자신과 세계, 자신과 과거를 연결해주리라 믿지 못했다.


영화는 적어도 그렇게 말한다. 소설은 한나가 끝내 자신의 과거와 대면했음을 암시하는 증거들을 남겨둔다. 영화는 이를 거부한다. 소설보다 영화는 조금 더 과거의 세대에 냉소적이다. 진심으로 자신의 죄과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문학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문학의 한계선이 여기에 그어진다 선언하는 듯하다. 소설은 소설을 배반하지 않으나, 영화는 소설을 믿지 않는다.


그의 읽기는 오로지 체호프의 소설 주위를 맴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두 남녀의 위험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소설만이 그녀의 '욕망'이었던 것처럼.


문학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직면하길 거부하면 한없이 무기력하다. 뉴욕에서 만난 생존자는 그 스스로가 고통의 경험을 문학적으로 서술해내어 추악한 진실을 고발해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카타르시스를 바란다면 책이나 읽으라 마이클에게 일갈한다. 이 정도의 냉소적 태도는 소설엔 없다.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작은 희망을 남긴다. 무엇인가를 읽을 수 있다면 끝내 자신의 과거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리라. 나는 소설이 결말을 대하는 방식에 고개가 더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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