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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l 11. 2023

사람이 아니면 정의로울 수 없다

클로드 샤브롤, <의식>(1995)

* 영화 <의식>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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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린다의 호의는 파멸을 유도한다. 우연한 계기로 소피가 글을 읽을 수 없는 문맹임을 알게 되자 멜린다는 그녀를 위로한다. 난독증에 걸린 사람은 많으며, 이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대 줄 수 있으며 자신이 이를 돕겠다고 설득한다. 소피는 이러한 호의에 강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통화를 엿들어 알아낸 멜린다의 비밀로 그녀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멜린다는 아버지 조르주에게 비밀을 털어놓았고 손쉽게 용서받는다. 분노는 소피에게로 옮겨간다. 조르주는 자신의 비밀을 아는 듯한 우체국 직원 잔느와 친하게 지내는 소피가 못마땅했다. 몇몇 요청들을 이행하지 않았고, 잔느를 집으로 몰래 데려오기도 했다. 조르주는 소피를 해고하면서 일주일의 말미를 준다. 나름의 호의는 산탄총으로 돌려받는다. 소피와 잔느는 자비없이 릴리에브르 가족을 사살하고 만다.


사냥을 시작한 것은 잔느지만, 사냥을 끝낸 것은 소피다.


소피의 적개심은 영화의 시작부터 증폭된다. 카트린은 면접 장소에서부터 소피의 요청을 묵살한다. 이는 호의로 포장되어 있다. 차라도 마시라는 카트린에게 소피는 괜찮다고 대답하지만, 카트린은 끝내 차를 주문한다. 집에 도착한 소피에게 카트린은 짐을 천천히 풀고 나오면 집 구조를 알려주겠다 말하고 소피는 지금 바로 나가겠다고 대답한다. 카트린의 표정은 일그러진다. 물론 뒤로 돌아 있어서 표정을 보여주지 않을 정도의 예의는 차린다. 카트린은 일요일에 딸 멜린다의 생일잔치 준비를 도와줄 수 있느냐고 소피에게 묻는다. 소피는 그날 잔느와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하라고 답했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소피는 생일잔치 준비를 돕고 있다. 


카트린만이 아니라 소피를 둘러싼 릴리에브르 가족과 그의 집이 소피의 분노를 추동한다. 특히 서재의 소유자인 조르주는 소피의 수치심을 계속해서 자극한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녀에게 가족의 필요를 위해 운전면허를 따라고 종용하고,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전달해달라고 한다. 그녀는 상황을 모면하고자 기묘한 안경을 사거나 전화기가 울리지 않았다는 식으로 대응하지만 그런 대응은 소피에 대한 조르주의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끝내 소피가 책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장면은 예정된 것이었다. 


잔느는 책을 쏘지 않는다. 그는 문자세계의 일부분이기도 했으므로. 오로지 소피만이 책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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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가 방에서 마주한 매체는 책이 아닌 텔레비전이다. (그녀가 책을 마주하는 것은 단 한 번, 발음을 해내려 애쓸 때다) 거실에 위성 텔레비전을 설치하느라 소피의 방으로 밀려들어온 녀석이다. 그녀는 몇 번 버튼을 조작한 끝에 전원을 켜는 데 성공한다. 그녀는 침대가 아닌 바닥에 앉아 텔레비전을 바라본다. 화면엔 자막이 뜬다.



On ne peut etre juste si 'on n'est humain. - vauvenargues

사람이 아니라면 정의로울 수 없다 - 보브나르그


정의나 공정은 인간들 사이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누구일까? 이 문장을 이해할 줄 아는 를리에브르 가족과 같은 이들일 것이다. 반대로 이 글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당연한 몫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배제하는 문장조차 읽을 수 없다. 이 문장을 읽을 수 있게 가르쳐주는 것은 호의일까? 그리고 그 호의는 보답을 받을 수 있을까? 이로서 멜린다의 호의가 파멸을 예비한다는 것은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단지 비밀을 서로 공유했기 때문에 긴장이 생겨나서가 아니다. 그것은 소피가 자신은 인간에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인간'의 '정의'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만의 규칙을 들이밀 수 있다. 마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처럼 말이다. 소피와 잔느도 자신들만의 규칙을 밀어붙였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은 냉정한 것일까, 아니면 냉소적인 것일까. 나는 이 영화가 후자에 조금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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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인 루스 렌델의 <활자잔혹극a judgement in stone>은 범인을 시작부터 공개하고 어떻게 범행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서술한다면, 영화는 범행을 마지막으로 미루는 대신 소피의 적개심을 층층이 쌓아간다. 소설은 최초의 문장이 마침내 타당해지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면, 소설 출간 이후 18년이 지난 1995년에 만들어진 영화는 이를 동일하게 반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독은 알았다. 그리하여 소피의 적개심과 수치심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사건들을 쌓아올리는 과정에 공을 들였다. (영화의 파국은 오로지 15분만 할애되어 있다)


소피는 글을 익히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처형이 용인되지는 않았지만.


감독은 감정적으로 어느 한 쪽으로 휩쓸리지 않는다. 조너선 로젠봄은 "자신의 부르주아 캐릭터들을 아이러니나 빈정댐 없이 처음으로 긍정하는 듯하다"(에센셜 시네마, 102p)고 말하면서도 이 작품에서 자신이 속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애증의 관계도 불분명해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딱히 죽을만큼 잘못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속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가 적개심을 유발한다는 사실과(카트린은 끝내 왜 소피가 오기 일주일 전에 도착한 가정부가 일을 그만뒀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정당한 적개심이었을지라도 그들이 벌인 파국에 대한 대가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동시에 뿜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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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기 때문에 고용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잔느와 소피는 가족을 죽인 죄로 수사를 받았고, 증거가 없어 풀려났다. 다만 관객은 잔느의 딸은 사고로 죽었을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잔느의 입을 통해서 듣지만, 소피의 사건에 대해선 알 수 없다. 신문에서는 부동산 업자들이 개발 이익을 노리고 불을 지른 것이 아닐까 추측하지만, 잔느는 곧바로 묻는다. "당신이 아버지를 죽였어요?" 웃는 잔느를 따라 함께 웃으며 소피는 대답한다. "그들은 증명할 수 없었어요."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과 자신들이 만들어냈지만 끝내 통제할 수 없는 적대의 대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떠올리게 한다. 적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을 고용하는 부르주아와 그 무지를 비웃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의 동질감.


함께 웃는 장면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따라 보는 자의 위치도 알려진다.


영화는 이를 찬미하지 않는다. 소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소피에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가 왜 문맹이 되었으며, 그녀가 아버지의 죽음에 정말로 책임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녀의 적개심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도 자신의 몫을 얻지 못한다. 자리를 얻기 위해선 책을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총에 자신이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라는 텍스트를 감상하고 소비할 수 있는 당신이 바로 소피의 과녁이기 때문이다. 소피가 어둠으로 사라져갈 때, 그녀가 어딘가에서 또다른 처형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증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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