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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Nov 28. 2022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는 김 교수를 생각했다

221128

  오전 오프인 하루. 점심 약속 전까지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었다. 같은 책을 세 번째 읽은 것인데, 볼 때마다 새로워서 신기하다. 독서 중 책을 덮고 몇번이나 큭큭 웃었다. 이런 유머 감각은 도대체 어디서 기르셨을까.


근무를 마친 시각, 스타벅스에서 찰칵.


  앞뒤로 붙은 문장과 문장, 문장 내 단어와 다른 단어 사이 충돌이 김 교수의 글을 읽는 특별한 재미다. 영화로 치면 몽타주 기법 같달까. 특정 단어나 논리를 접하는 독자는 자연스레 연관 단어와 이후 논리 전개를 연상하기 마련인데, 김 교수는 기대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상관 없어 보이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이어 붙이고, 극단적 행동으로 치닫는 상상을 글 군데군데 집어 넣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한 인용문은 다른 책에서 가져왔다).


"뭔가 귀중한 것들을 과감하게 소비한 이에 대해서는 부러운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실로 여러분들은 학창 시절 동안 귀중한 것들을 가차 없이 소비했습니다. 비싼 학자금이랄지, 젊음이라는 이름의 소중한 시간이랄지, 흡연과 과음으로 거덜 나기 이전의 깨끗한 장기랄지." - 「2월의 졸업생들에게」


수업 시간 도중에 특별한 이유 없이 강의실을 나가서도 안 됩니다. 오래전 일인데요, 강의 도중 어떤 학생의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그 학생은 그 전화를 받기 위해 천연덕스럽게 강의실을 나갔다 오더군요. 오랫동안 자아 수양을 해왔기에, 다행히 그 학생에게 날아차기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 「이 수업은 여러분들의 지적 변화를 목표로 합니다 - 수업 첫 시간」, <공부란 무엇인가>


"그때도 나는 다소곳이 앉아 있기보다는 앞에 놓인 탁자를 당수로 쪼개며 "선생님들, 논문을 읽지도 않고 심사한다고 여기 앉아 계실 수 있는 겁니까!"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목젖을 뽑아 줄넘기를 한 다음에, 창문을 온몸으로 받아 깨면서 밖으로 뛰쳐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 「위력이란 무엇인가」


  익숙한 표현을 낯설게 보는 것도 김 교수의 재능이다. 그의 글을 읽고난 뒤 나는 '미래지도자' '추석은 민족 최대의 명절' 등 표현을 예전처럼 생각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뼈를 때린다'는 나름 새로운 표현도.


"미래지도자라는 표현이, 미래에 꼭 지도자가 되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담은 것이라면, 저는 걱정이 앞섭니다. 사실, 인간은 미래를 예측, 통제할 수 없는 한심한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한다고 한들 그것이 꼭 좋으리라는 법도 없습니다. ... 다른 일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져서, 정작 더 중요한 일(이를테면 미래가 아닌 현재)에 소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 「미래지도자가 되겠다는 이들을 위한 격려사」


""추석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말도 삼가는 게 좋다. 이미 한국 사회에 많은 다민족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 조선왕조 창업 공신의 일부는 여진족이고, 고려 후기 상당수의 왕들은 몽골 공주와 혼인했으며, 단군을 낳은 환웅과 웅녀는 같은 민족이 아니었다." - 「추석을 즐기는 법」


"진상이 무엇이든 정체성이 부재한 대상에게 원칙에 입각한 비판을 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연체동물에게 뼈를 때리는 비판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서울대학교의 정체성」


  곰곰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인데, 좀체 상상하지 않는 표현도 김 교수는 아무렇지 않게 쓴다. 김 교수의 유명 칼럼인 '추석이란 무엇인가'가 이에 해당하는데, 특정 상황에서 적절한 말과 해서는 안되는 말이 있다는 기대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효과는? 적어도 나는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정체성에 대해, 그의 결혼식 축사를 본 뒤에는 서로 다른 이들 간 결합의 본질에 관해 새삼 되짚어 봤다.


"예쁘고 잘생기면 뭐하겠습니까. 오랜 시간을 함께 살고자 결혼식을 하는 것이라 할 때, 청춘의 아름다움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고, 빛나는 외모는 장기적으로 결혼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애 기간 동안에야 상대에게 화가 나려고 했다가도 잘생기고 예쁜 얼굴을 보다 보면 저절로 화가 수그러들곤 했겠지요. 그러나 사람이 살다 보면 결국 늙어서 피부의 탄력은 사라지고, 아랫배는 나오고, 경우에 따라서는 탈모라는 충격적인 현실이 다가옵니다." - 「5월의 신랑 신부에게」


  생각을 크게 불러일으키진 않지만, 도발 자체가 웃긴 문장도 있다.


"철없는 애인이 전화를 해서 묻는다. 나이를 먹고 살이 쪄서 돼지가 되어도 당신은 날 사랑할 거야? ... 아니, 그땐 돼지를 사랑할 거야. 당신은 사라지고 돼지만 남아 있을 테니." - 「시간의 흙탕물 속에서」


"제국의 언어로 강의를 하다 보니, 제국어 실력도 경미하게 나아졌다. 학생이 등굣길에 발랄하게 "How are you?(상태가 어떠쇼?)"라고 인사를 하면, 동양의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Just existing(나는 존재할 뿐이다)"이라고 수줍게 대답할 정도는 되었다." - 「유학생 선언」


  무엇보다 나는 김 교수의 마지막 문장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감각에 감탄한다. 무언가의 초입에 서 있는 듯한 긴장감, 비실비실 웃게 만드는 터무니 없음이 그의 마지막 문장에는 있다. 대개는 단단한 바위처럼 글의 논의를 꾹 눌러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만드는 문장이지만, 때로는 다른 생각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된다. 대선후보에 대한 그의 묘사가 정치란 무엇인가를 묻게 만드는 것처럼.


"그날 이후 나는 시험 감독 아르바이트에 응하지 않았고, 어른이 될 용기를 상당 부분 잃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그런 난감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는 무익한 기간을 거쳤다. 그 기간이 끝나고 이 사회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느낄 무렵, 어디로부터인가 적페청산을 목표로 하는 정권이 등장했다." - 「적폐란 무엇인가」


"위력에 저항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내가 명랑했던 때 나는 외국에 있었지만, 한국에서 어느 대학원생 하나가 원로교수의 위력에 저항했던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당시 등록금 명세서에 보면 ‘개인 지도비용’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지도교수와 학생 간에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지도를 비용으로 계산하는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느 날 교정을 걷던 원로교수를 불러 세우고는, 당신이 나한테 개인적으로 지도한 적이 단 1분도 없는데, 왜 이 돈을 받습니까, 라고 따졌던 것이다. 이 흥미로운 질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론을 맺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는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대학원을 그만두었고, 지금은 남쪽 지방에서 복지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 「위력이란 무엇인가」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라고.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 「추석이란 무엇인가」


"후보가 동문서답으로 일관할 때, 사회자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 거다. "식사하셨습니까?" 먹고왔다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룩하게 또 묻는 거다. "준비를 이렇게 엉망으로 하고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던가요?" 이때, 당황해서 울먹이는 후보는 삼류, 부끄러운 나머지 그 자리에서 후보 사퇴를 선언하는 후보는 이류, 밥값을 못했으니 반성하는 차원에서 토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시작하는 후보, 그가 바로 일류다." - 「대선후보와 토론하는 법」


  이 모든 촌철살인과 유머의 근간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고도 따뜻한 이해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김 교수가 흔한 글쟁이 이상의 존경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나는 짐작한다. 팬덤의 이면에 자리한 증오와 경멸, 무시를 존경받는 이는 어렵지 않게 비켜간다.


"이번에는 내가 흐느껴 울 것 같은 영화였다. <레이디 버드>에 나온 여학생보다 훨씬 더 경제적으로 불우했기에 결국 노숙자가 되고 만 여자 주인공이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되고 싶었으나 될 수 없었던 의연하고 강한 사람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 「레이디버드와 소공녀」


"이 세상에는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찾아가면 좋을 전문가는 없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날 학생을 잘 위로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도 대학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위로가 되기 어려운 이야기만 털어놓았다. ... 컨디션이 좋을 때의 김현석 감독은, 우리 삶은 거대한 어떤 흐름 위로 무력하게 스쳐 지나가는 거품 같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아이 캔 스피크」


"상처도 언젠가는 피 흘리기를 그치고 심미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성장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다." - 「성장이란 무엇인가」


"이성을 함양하고자 하는 교육기관이라면, 중요한 선택을 하거나 권위를 창출할 때 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숙의 과정은 그 선택과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정당성을 잘 표현된 글을 통해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을 때, 구성원들은 비로소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다. 영화 <빅 칠The Big Chill>의 주인공에 따르면 정당화는 섹스보다 중요하다. 단 하루도 안 할 수 없으므로."


"오늘날 이 사회의 비극은, 죽은 환자의 존엄과 산 의사의 존엄, 그 두 가지를 온전히 동시에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데 있다." - 「어떤 자유와 존엄을 선택할 것인가」


이날의 일은 오랫동안 수치의 기억으로 남았다. 선생님들에 대한 분노의 기억이기 이전에 그 과정을 그렇게 치러냈던 자신에 대한 수치의 기억으로. - 「위력이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김영민 교수의 글 두 편을 소개한다. 하나는 "개돼지" 발언으로 유명해진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을 비판한 칼럼. 연체동물에게 없는 뼈를 만들어 준 뒤 때리는 고급 타격기가 일품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69/0000153542?sid=110


  다른 하나는 '르포르타주'. 무려 유교랜드 방문기. 이 글을 읽은 뒤 나는 그간 따랐던 르포기사 작성 관행을 흰자위로 쳐다볼 수 있는 자유를 손에 넣었다. 흉내내려 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하고 무력한 예감과 함께. 기사란 무엇인가.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80616490005178?di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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