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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Nov 29. 2022

이것은 아이덴티티인가

22.11.29. 히라노 게이치로, 나란 무엇인가 2


#1.

히라노 게이치로, <나란 무엇인가?>(2015) : 어제에 이어 마저 읽는다.


SNS로 인해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얼굴들의 존재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 사실 꼭 SNS의 문제라기보다는 연결의 상태가 점차 복잡해지는 '초연결'의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향하는 얼굴이 아닌 얼굴도 알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만 - 사람들은 진정한/거짓된 나라는 구별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설명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인격을 다양한 공간에 별도로 전시하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편이지만, 초창기 인터넷 시대에는 무엇이 진짜인지에 대한 심도 높은 고민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일단 납득할 수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진심/거짓의 서열화된 분리가 잘못된 이유들을 다시금 정리한다. 1)누구와도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타자와 자기를 모두 부당하게 폄하한다. 2)애초에 그 '가면'이라는 것도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기에 조금씩 그 모습이 변하기도 한다. 3) 진정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실체가 없다. 그러니 이것은 환상에 기댄 부당한 구별이다.


진정한 나를 찾으라는 압력은 사람들을 괴롭힌다. 개성을 찾으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말은 '개성과 장래의 직업을 연결하라'는 압력이다. 문제는 사회가 선호하는 장래의 직업은 한정적이라, '한정적으로 개성적이라'는 모순된 요구를 받고 성장하는 셈이다. 게다가 그 직업을 택하려는 경쟁은 얼마나 고된가. 직업도 얻기 어려운데, 개성을 드러낼 방법도 없으니 고통은 배가된다. 사회 안에서 자리잡지 못한 사람들은 은둔형 외톨이가 되거나, 자아 찾기 여행에 매몰된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진정한 나'란 무엇인지 찾는 과정일텐데, 실체 없는 목표에 매진한 결과는 어쩌면... 꽤나 허무할 것이다.


저자는 이 고통에 직면하여 '소설 쓰기'라는 방식을 택했다. 소설 속에서 이 고통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 것이다. 그는 소설 쓰기를 통해, 그리고 소설 읽기를 통해 하나의 인간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격들의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무엇이 '진짜'인지 묻는다. 얌전하던 학생이 갑자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 학생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얌전한 모습은 진심을 숨기기 위한 가면에 불과할까? 그는 둘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이 허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출근할 시간이 되었다.




어제 경기 패배의 여파에 시달리며 다시 또 읽는다.


그의 소설을 전부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소설 속에서 어떤 개념과 장치를 활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진정한 나'라는 것이 있는지 의문을 품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소설이라는 수단을 잘 활용하려 고심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다. 1장은 그렇게 마무리 된다.


2장에서 그는 개인이라는 단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애매한 부분들을 지적한다. 사회를 쪼개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로서 개인을 찾아냈지만, 그 개인이라는 것은 언제나 항상 복수로 동시에 존재한다. 그것이 사회적 인간의 운명이다. 게다가 언제나 다종 다양한 인간들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개별적인 사람들과 각각 독특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 독특한 관계의 다발 모두가,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인해서 동등하게 진실이라고 본다. (물론 거짓으로 속이는 관계가 있겠으나,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반론적인 부분이긴 하다)


언뜻 영화 <아이덴티티>를 떠올리게 만드는 섬뜩한 부분이 있지만, 그는 이 네트워크에 중심이 없다는 주장을 계속 밀고 나간다. 그때 그때 중심축이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중심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특정한 사람들과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반복을 통해 형성되는 패턴인 셈이다.


그의 분인 개념은 몇 가지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는 범용성이 높은 사회적 분인 개념이다. 쉽게 말하면 보통 사람의 느낌, 어디에 가든 최소한의 얕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인격이라고 이해하자. 그 다음엔 구체적인 특정한 그룹용의 분인이 있다. 조금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인격이다. 최종적으로는 그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는 개별적인 인간을 대하는 특정 상대용 분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 계속해서 교류를 하다보면 서로 사회적 분인 > 그룹용 분인 > 상대용 분인으로 점차 자신이 드러내는 분인의 단계를 조정하게 된다. 건너 뛰기도 하고, 더 이상 구체화되는 데 실패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다종다양한 분인의 집합체로 존재한다.


우리가 분인의 집합체이고, 주된 분인을 그때 그때 바꿀 수 있다면 필요한 분인으로 갈아타거나 때로는 필요 없는 분인을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불필요한 파일을 지우듯, 분인도 정리 가능하다. 서로가 알 수 있는 것은 분인에 불과하므로, 상대방이 아는 나의 분인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면 삭제할 수 있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겠으나) 내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전부 부정하기보다는 그 공간에서의 나의 분인이 문제였던 것이라 치부하고 그것을 중심에서 밀어낼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건강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나는 얼마나 동의할 수 있을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개념을 고민하는 지점은 훌륭하지만, 여전히 예상보다 훨씬 간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손쉽게 그렇게 나는 분인의 비율과 중심축을 바꿀 수 있는 것일까?


3장에서 그 고민들이 해결되길 기대하다보니 점심시간이 끝났다. 오늘은 책을 더 읽기 어려울 것 같은 체력이라 여기까지 읽고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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