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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Nov 29. 2022

오징어와 고래 잡으러

221129

  첫날 노트를 오버해 쓴 감이 있어 부기한다. 표제 '오늘 뭐 봤어'가 드러내듯 이 글 묶음의 소재는 '본 것' 전반이다. 첫 회는 독서 후기에 한정했지만 영화에 관한 감상평도 같이 적을 생각이다. 영화도 어차피 한 편 텍스트이니 별 차이 없나. 어쨌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일로 여가 시간을 거의 다 쓴다. 혓바닥이 길다는 느낌이 드신다면, 당신이 맞습니다.



  간밤엔 <오징어와 고래>를 봤다. 감독은 노아 바움벡. 필모그래피 내내 가족이란 소재를 놓지 않은 사람이다. 작품마다 결은 조금씩 다르다. 대표작 <결혼 이야기>는 꿈을 포기해 괴로운 여자 연출가와 그를 이해못한 성공한 남자 감독의 파경을, <마이어로위츠 이야기>는 고집불통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녀들의 억하심정을 다룬다.

  <오징어와 고래>는 개중에 독특하다. <결혼 이야기>와 <마이어로위츠 이야기>가 억울함(니콜은 결혼으로 커리어를 망쳤다 생각하고, 해롤드는 특출난 예술가인 자신를 세상이 몰라준다고 원망한다)과 인정투쟁(니콜과 찰리는 서로의 고생 및 양보를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고, 매튜는 돈 버는 능력을, 대니는 자신의 예술가적 재능을 아버지가 인정해주길 원한다)이란 공통 정서를 보인다면, <오징어와 고래> 두 아들에겐 그런 것이 결여돼 있다. 반대로 아들들에게 부모의 인정을 욕망할 만한 무엇인가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감독은 '부모됨'의 실패를 그 원인이라고 보는 듯하다. 아빠 버나드는 한때 잘나갔지만 지금은 번번히 출판 계약에 실패하는 소설가고, 엄마 조안은 바람둥이다. 이제 막 작가로서 역량을 펴는 조안을 버나드는 견제한다. 조안은 버나드가 집안일을 떠넘긴 채 살면서 잔소리만 늘어놓는 것이 불만이다. 조안의 외도 사실이 밝혀지면서 둘은 이혼을 결정한다. 아들들은 다짜고짜 '오늘 저녁 가족회의를 한다'는 말에 집에 모였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부부가 자식들을 대하는 방식은 내내 이혼 사실을 통보하는 장면처럼 일방적이다. 큰아들 월트가 "'두 도시 이야기' 어때요?"라고 물었을 때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버나드는 이렇게 답한다. "찰스 디킨스의 평작이지. <데이비드 코퍼필드>나 <위대한 유산>이 낫다. 왜 학교에선 위대한 작가들의 쓰레기 같은 작품만 가르치는지." 조안은 옆에서 반발한다. "그래도 니가 읽어보고 판단해라." 두 사람의 캐릭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는 언뜻 조안이 더 괜찮은 부모처럼 보인다. 그녀가 "아버지는 어떻게 만났느냐"는 월트의 질문에 "대학에서 만났어. 그 전에 만난 남자와는 창고에서 섹스를 했지"라며 자기 하고 싶은 말만 건네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은 적 없으니 자녀들은 영화 내내 사고 투성이다. 월트는 아버지를, 동생 프랭크는 어머니를 조금 더 따르지만 돌출행동을 저지른다는 점에서는 같다. 프랭크는 자위를 한 뒤 학교 도서관 서가, 친구 사물함에 정액을 바르고 다닌다. 월트는 핑크 플로이드의 'hey you'를 자기 작품인 양 학교 행사에서 발표한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에 관해 에세이를 쓰지만 실은 읽어본 적도 없다. 아버지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여 친구들 앞에서 자동응답기처럼 꺼내놓을 뿐. "네 나이 때는 더 많은 여자를 만나" "자유를 누려" 같은 아빠의 조언을 따르던 월트는 결국 여자친구를 잃고 만다. 그나마 마음에 뒀던 아빠의 제자는 아빠와...(중략)

  월트가 불현듯 상담교사 앞에서 어린 시절 기억을 꺼내놓는 장면이 영화의 변곡점이다. 그는 엄마와 뉴욕 내셔널갤러리에서 오징어와 고래를 봤다고, 무서웠다고 말한다. 내내 아빠 얘기만 따르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례적 반응이다.

 지금도 그럴까. 영화 말미, 월트는 내셔널갤리리로 향한다. 화면 속 고래와 오징어의 모습은 그리 무섭지 않다. 뭔가에 홀린 듯 집중한 월트의 얼굴 클로즈업과 거대 오징어 모형 앞 월트의 뒷모습 원경을 몇 차례 교차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열심히 읽은 분들에게 미안하지만 이 영화는 노아 바움벡의 범작이다. 캐릭터 구축이 지나치게 압축적이라 인물 간 다이내믹스에 몰입하기가 어렵다. '끝까지 간다'는 의미 아니다. 인물의 성격적 특이성을 납득할 만한 요소 없이 원형에 가깝도록 깎아냈다는 뜻이다. 설정을 받아들여야 이야기 전개에 끄덕거릴 수 있는 장르는 sf로 충분하다. 노아 바움벡이 딱히 카메라를 잘 쓰는 감독도 아니고(끽해야 핸드헬드인데, 흔들리는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으로는 너무 전형적이다). 우디 앨런스러운 예술가 특유의 자의식 과잉, 시기, 질투, 자기 정당화와 거기서 뻗어나오는 미묘한 갈등이 그나마 웃음 포인트랄까.

  그래도 제목 하나는 확실히 잘 지었다 싶다. 엄마와 아빠는 오징어와 고래처럼 사납게 싸우고, 물 안에 함께 사는 이들은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예민할 밖에. 자기 물길을 찾고 헤엄치는 순간은 언제쯤 오나. 한 쪽에 붙어 보고 배우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노아 바움벡이 편집한 마지막 시퀀스는' 어찌됐던 자기 눈으로 똑똑히 마주하라'고 당부하는 것만 같다.


*가나전 재밌었음. 작은 방심, 실수, 오판으로 중요한 것을 잃은 주인공이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끝내 처음 실책의 자장을 넘지 못하고 패배하는 이야기. 꼭 비극적 영웅의 서사 아닌가. 2002년 이후의 한국 축구는 꼭 작은 성공에 안주하거나 회피하는 이야기로 귀결하는 느낌이었는데, 이번 경기로 그 인상이 확 뒤집혔다. 졌잘싸이자 싸잘졌인 90분을 꽤 오래 마음에 담아두게 될듯. 조규성 화이팅. 손흥민 화이팅.


*오늘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술을 마실 거라 책은 읽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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