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문희 Dec 10. 2022

가족의 무게

221210

  오늘은 오전 내내 <가족의 무게>를 읽었다. 일본 논픽션 작가 이시이 고타의 책이다. 소재는 가족 간에 벌어진 살인 사건. 저자인 고타의 언어로는 '가족 살인'이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 작품의 질을 의심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읽다가 약속 시간에 늦을 뻔했다. 한 자리에서 홀린 듯 끝까지 봤다. 기사체로 쓰인 글이라 익숙한 탓도 있었지만, 전개가 깔끔했다. 누군데 이렇게 잘쓰나 싶어 찾아보니, 출세작 제목부터 남다르다. <구걸하는 붓다>. 개발도상국의 걸인들을 다룬 르포르타주란다. 2011년에는 <유해>라는 작품에서는 동일본 대지진 당시의 시신 처리 문제를 다뤘다는데, 소재를 찾는 시선도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가족의 무게>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총 7장으로 구성돼 있다. 은둔형 외톨이, 돌봄 포기, 빈곤과 동반자살, 가족의 정신질환, 노노 간병, 아동 학대, 사건 이후의 삶 순서이다. 고타는 프롤로그에서 "가족을 죽이게 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사건이 일어난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은 무엇이 다른가?"라고 묻지만, 그 답은 목차에 예비돼 있다. 가족 살인 대부분은 가족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돌보던 중 벌어진 것이다. 모든 돌봄이 극단적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나, 돌봄이 전제되지 않은 가족 살인은 이례적이다.

  여기까지는 한국의 언론에서도 종종 다룬 논점이다. 그들 취재의 결론도 기억난다. 복지를 포함한 '돌봄 체계'의 확대와 재구성. 하지만 고타는 같은 길을 따르지 않는다. 공적 지원의 중요성을 언급하지만, 정부의 역할로는 메울 수 없는 구멍도 함께 직시한다.


  "언론이 처참한 학대 사건이나 동반 자살(*부적절한 용어 사용이지만 책에 쓰인 대로 적는다) 사건을 보도할 때면 "정부의 복지 정책이 불충분하다"라는 말이 나오고 공적 지원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렇지만 가족의 문제가 공적 지원을 받거나 스스로 노력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일까?"


  "얼핏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가족 관계가 악화되면서 벌어진 처참한 사건이다. 그래서 간병 스트레스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사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가족이 갖고 있던 갈등이 간병 문제와 만났을 때 당사자들조차 상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같은 균형감 때문에 공적 지원의 중요성이 더 두드러졌다. 가족 간 뿌리깊은 갈등이 살인에 이른 다툼에 기름을 끼얹었다 해도, 발화에 이른 여건은 다른 곳에 있지 않은가. 전자가 심화 요인이라면, 촉발 요인은 후자일 것이다. 둘 중 하나만 있을 때 불은 극한에 이르지 않는다.

  책을 덮은 뒤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특히 한 문장이 마음에 박혔다.


  "어쩌다 이렇게 됐어?"


  아버지를 칼로 살해한 어머니 히데미에게 아들 나루미가 던진 질문이다. 아버지 쓰토무는 뇌출혈로 쓰러진 뒤 몸을 쓰지 못했는데, 히데미 홀로 쓰토무를 돌봤다. 단독주택에 함께 거주했지만 나루미는 히데미를 돕지 않았다. 쓰토무는 고집이 세고 밤마다 화장실을 오가야 해서 히데미는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나중엔 우울증이 생겼고, 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때도 나루미는 부모를 방치했다. 그래놓고는 "어쩌다 이렇게 됐어?"라니. 몰라서 묻나.

  웃기는 놈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궁금했다. 가족 살인을 다루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나루미와 다른가. 그들 가족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쩌다 그런 선택에 이르는지 등 문제엔 전혀 관심 없다가 사건이 터지고 나면 "어쩌다 이렇게 됐어?"라고 묻는 것은 아닐까. 특히 고타가 에필로그에 적은 다음 문장에 마음이 심란했다.


  "나는 언론이 열광하는 유명한 사건들이 일본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의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는 생각이 늘 들었다. 살인 사건의 절반 이상이 친족 간에 벌어지는 일이고, 대부분은 자세한 내용이 보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사건들에 주목해 그 배경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전체 살인 사건의 절반 가까이가 가족 살인이라면 언론은 후자도 충실히 다뤘어야 한다. 가족 살인 상당수가 돌봄 상황과 공적 지원의 부재에 기인한다면, 이들 문제에 더 많은 초점을 맞췄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했나.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다. 살인 사건은 잔혹할수록, 피해자의 수가 많을수록 더 잘 기사화됐다. 서울신문의 <간병 살인> 연작처럼 가족 간 벌어진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구조적 문제까지 짚은 기사는 없진 않으나 드물었다.

  고타의 취재 방법에도 새삼 충격받았다. 그는 이렇게 쓴다.


  "취재 방법은 각 사건의 재판 방청이 중심이 되었다. 사건 관계자의 증언은 피고인에 대한 질문과 증인신문에서 나온 발언에 기반했다.  SNS와 문자메시지 기록, 부검 결과, 사건의 경과 등은 공판에서 증거로 제출된 것들이다. 재판에서 밝혀진 사실관계만으로 부족한 부분이나 근거가 필요한 부분은 관계자 인터뷰 등을 통해 독자적으로 취재를 진행했다."


  기성언론이 잘 선택하지 않는 취재 방식이다. 당장 나도 이같은 사건을 기획취재하라면 당사자와 접촉할 방법부터 찾는다. 취재원의 전화번호와 집주소를 찾고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다. 법정은 법원 출입 기자의 영역이다. 공판을 볼 때도 물론 있지만, 기획기사 대부분을 공판 내용에 기초해 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반대로 법원 출입 기자는 '이런 사건'을 좀체 취재하지 않는다. 당장 남욱, 유동규 재판을 기사화하기에도 하루가 빡빡하다.

  고타의 취재물과 근접한 건 회사 선배인 전현진 기자의 기사 정도 같다. 그는 법원에서 남들이 쓰지 않는 재판 기사를 쓰는 걸로 유명했다. 대부분 기자들은 선고가 나면 그 결과를 기사로 쓰는데, 그는 선고 전 공판 내용을 기사에 담았다. 선고가 있는 날이면 선고 내용보다는 재판정에서 벌어지는 대화, 법원에 출두한 인물의 표정, 제스처 등 스케치를 기사에 앞세웠다. 그는 국내 1위 대기업 '삼성'의 재판을 시리즈로 엮고자 했는데, 부서가 바뀌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가족 살인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같은 책을 썼겠지.

  언젠가 법원에 출입하게 된다면, 이렇게 내 문제의식을 부여잡고 시리즈물을 써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사는 기획팀을 꾸려야 겨우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에 불과한 것 아닐까. 어쩌면 지금도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국회 상황과 정치부의 기사 작성 문법에 내가 너무 냉소적인 나머지, 가능한 도전을 방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P.S. 사회부에서 쓴 <짧은 숨의 기록> 기획은 이같은 문제의식을 담았으나 독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동학대'라는 범주로 뭉뚱그리지만, 만 18세 미만 연령대 중에서도 만 2세 미만 영아가 학대에 가장 취약한 집단이다. 학대가 죽음으로 이어질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이들 집단을 향한 학대만 잘 막아도 아동학대로 인한 사망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살릴 수 있는 아기들을 왜 살리지 않나. 기사를 쓴 게 벌써 2년 전인데, 그때와 지금 뭐가 바뀌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래는 기사 첫회차 링크. 나머지 기사는 네이버 또는 경향신문 홈페이지에서 '짧은 숨의 기록'을 검색하면 나온다. 취재 후기도 함께 옮겨둔다. 한명이라도 더 읽다 보면, 언젠가는 변화가 생길 수 있으니.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008200600045



http://m.journalist.or.kr/m/m_article.html?no=48280


매거진의 이전글 게임을 돈으로 하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