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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Dec 11. 2022

'현질'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22.12.10. 이경혁, 현질의 탄생 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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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벽 4시에 열릴 잉글랜드 : 프랑스 경기 모니터링을 해야 해서 새벽에 깨 있어야 한다. 잠을 잤다가 못 일어날 수도 있어서 깨 있기로 했는데 시간이 살짝 비어서 <현질의 탄생> 2부의 남은 분량을 마저 읽기로 했다.



저번에 한 말이지만, 납금플레이는 새롭지 않다. 오락실에서 게임 오버 직후 동전을 넣어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는 '컨티뉴 플레이'도 일종의 납금플레이다. 기본적인 스테이지 구성은 그대로 두고, 적의 숫자나 속도를 바꿔 난이도만 변경하는 초창기의 디지털게임에는 컨티뉴 플레이란 개념이 없었다. 하다가 게임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했다. 더 오래 하고 싶으면 숙련도를 올려야 했다.


그러나 이런 게임은 스토리랄 게 없다. 플레이어가 누구고 시대적 배경이 뭔지 설명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게이머들에게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짧게 반복되는 각각의 스테이지를 최대한 여러번 반복할 수 있도록 숙련도를 늘리는 부단한 연습이었다. 하지만 최종 보스가 있고, 성장하는 캐릭터가 있는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게임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스토리의 끝을 보기 위해 항상 처음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 저장 기능도 없는 오락실에서 그렇게 하다간 누구도 끝을 보지 못하고 동전을 소비하고 말 것이다. 뒷 부분의 스토리도 보여주고 싶은 제작자라면 어떻게 할까? 게임이 끝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게 만들면 된다. 물론 공짜로는 아니지만, 대신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조금 이득을 볼 수는 있도록 혜택은 준다. 순간적으로 무적 상태를 만들어준다거나, 그동안 모았던 아이템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화면에 떠 있어서 그 자리에서 다시 바로 레벨 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묻고 더블로 가" + "묻고 다시 가" + "너 다음에 한 판 더 해" = 오링인 것은 판박이


멀티플레이는 살짝 달랐다. 대전 게임에서 컨티뉴 플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곽철용이 고니에게 내뱉는 문장으로 요약이 될 것이다. "너 다음에 한 판 더 해." 잘 하는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기회는 실력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전탑 높이에 달려 있었다. 판판이 깨지더라도 어느 날에는 그 끊임없는 도전의 결과로 승리를 쟁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대가 피곤했을 수도 있지만) 돈이 있다면, 당신도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컨티뉴 플레이'에 대한 태도는 어땠을까? 저자는 1980-1990년대 오락실 이용자들 여럿을 인터뷰했다. 사람마다 조금씩 의견이 갈렸지만 대부분은 "컨티뉴 플레이를 바람직하지 못한 무언가로 취급하는 어떤 태도"(195)를 공유하고 있었다. 코인 하나로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것이 좀 멋진 일이었다는 건데, 아마 이것은 컨티뉴 플레이가 등장하기 이전의 게임 플레이에 익숙할수록 동의하기 쉬운 주장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질'의 시대에까지 이어지는 납금플레이에 대한 부정적 시선의 밑바닥에 놓인 생각이지 않나 싶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뒤에 나오는 사람들의 의견에 조금 더 마음이 기울었다. 돈만 있다면, 그리고 공간이 한산하다면 이어서 끝까지 가 볼 수도 있는 거 아니냐, 관중들에게 게임의 끝까지 서사를 보여주기 유용한 방식 아니냐 하는 건데, 나는 항상 몇 백원 정도 가지고 와서 형편 없는 실력으로 손쉽게 동전을 털리고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플레이를 구경하는 관중이었기에 그렇게라도 게임 엔딩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좋았다. 저 게임의 끝은 이렇게 이루어져 있구나, 최종 보스가 저렇게 생겼구나 하며 신기해했으니까. 이건 어쩌면 게임 플레이 스루 영상의 선조(!)격인 것 같긴 한데, 여하간에.


부분유료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온라인 게임의 구조는 납금플레이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강화시켰다. 저자는 <리니지M>과 <왕이 되는 자>라는 대표적인 온라인 게임의 결제 구조를 분석해 어떤 부분에서 게이머들이 불만을 터트리게 되는지를 파악한다. <리니지M>의 핵심은 PVP다. 게임 최고의 목표는 서버 내에서 최고 레벨을 달성하기다. 만렙이 있기는 하지만, 천장은 아니다. 영원한 경쟁에서 승리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남들보다 빨리 레벨 업을 하면 된다. 숙련도? 애초에 좁은 터치 패널로 할 수 있는 조작에 숙련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오로지 현금 투입량의 차이가 당신과 나의 승패를 결정한다.


확률보다는 확정 똥겜이 낫다는 것이 국내의 정설

<왕이 되는 자>는 타인과 직접 전투를 하진 않지만, <리니지M>과 목표는 비슷하다. 서버당 1명씩만 승급 가능한 '왕'이 되는 것이다.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고 그에 따른 경험치를 얻어 출병하고, 승급하는 게이머의 행위는 플레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극단적으로 싱글 플레이에 게이머의 숙련도가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고, 오로지 VIP 특권을 구매해 무료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과의 격차를 내길 요구한다. 두 게임 모두 '타인'과 경쟁하는데, 그 경쟁에 나의 '숙련도'는 무의미하고 오로지 '현금'만이 결정적인 변수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숙련도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은 게이머들을 좌절시킨다. 현실의 경제적 격차가 가상 공간으로서 게임 안에서의 실력 격차로 직결된다. 숙련도는 나의 신체가 아니라 게임 서버에 쌓인다. 게임을 오래 해서 나에게 남는 건 뭘까? 적어도 피파와 같이 기본적인 '손가락' 싸움이 중요한 게임은 현금 결제로 인한 격차를 불충분하게나마 유저의 숙련도로 메꿀 수 있기에 제작사를 욕하면서도 동시에 유행하는 메타를 이해하고 연습한다. 그런데 모바일게임의 현금 결제는 내게 남길 게 없다. 남는다면 서버에 기록된 나의 매출 기록과 유저 데이터 뿐이다. 저자는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게임플레이에서 오랫동안 나름의 긴장관계를 이어왔던 생산자로서의 게임사와 소비자로서의 이용자라는 관계가 이제 힘의 균형을 놓친 채 전적으로 게임사가 주도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한 것이다."(226)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 리니지 정액 요금을 지불할 때, 나는 3일 계정만 몇 번 만들었다가 그만두었던 경험이 있다. 한 번 결제를 시작하면, 지금까지의 지불액이 매몰비용이 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결제를 해야만 했다. 내겐 그럴 돈도 없었다. 그런데 멀티플레이가 재밌었다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엔딩 없는 게임에서 레벨업을 위해 행하는 '사냥'이라는 행위가 사실상 플레이어들이 시간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었다. 돈을 내기 싫으면 시간을 내라, 그 지루한 과정을 반복하며.


그런데 그 게임을 하는 내 인생이 방치형 게임 아니 방치이지 않을까


물론 멀티플레이에서 승리하는 쾌감은 싱글플레이를 끝내고 엔딩을 보는 데에서 얻는 쾌감과는 다른 차원이다. 하지만 멀티플레이 실력을 키우지 못한 내 입장에서 시작부터 벌어진 타인과의 격차를 줄이려면 시간을 태우든 돈을 태우든 하나는 태워야 한다는 게 아까웠다. 그리고 그렇게 진입 자체를 막아버리는 장벽으로 기능하는 현금 결제의 벽이 마뜩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다들 리니지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그 대화에 끼지 못했으니까. 그래서일까? 지금도 나는 고전적 게이머들의 불만에 상당히 공감한다. 조금 다른 방향에서이긴 하지만.


돈을 주고 승리를 산다, 혹은 돈을 낸 넘들만 승리한다는 Pay to Win은 그럼 정말 불합리한가? 부분유료결제가 활성화된 게임들의 대중적인 인기를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나이가 든 게이머들 입장에선 시간도 부족하고 세밀한 플레이가 불가능한 신체적/사회적 상황에 놓인다. 그때 현질은 젊은 사람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하는 보조 수단이다. 그러니까, 라식 수술 같은 거지. 또 어떤 게이머들은 확률형 아이템을 구매하는 행위에서 도박의 짜릿함을 느낀다. '가챠'가 게임의 목표라면 현질은 게임의 핵심 플레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동사냥'의 결과로 획득한 자원을 가지고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가 게임 플레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 사람들을 겨냥해 C&C4가 RTS에서 AOS/MOBA 스타일로 바꾼 것... 아니 근데 존재는 했...


변화를 긍정하든, 부정적으로 바라보든 게이머들은 게임 플레이에서 이전보다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는 게임이 더 이상 1회성 구매를 통해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 꾸준히 이용료를 내고 대여애햐 하는 서비스로 변화하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게임은 이제 여가와 경쟁을 즐기고 싶은 게이머들과, 그들을 위한 상품을 판매하고 이윤을 획득하려는 게임사 사이를 연결하는 플랫폼이다. 숙련도를 독점한 게임 서버 앞에서 게이머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점차 축소될 때, 게이머들은 자신의 '플레이'를 돌려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돈을 많이 쓴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게이머가 게임 플레이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게 '현질' 문제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이제 어느 영역에서든 참여자들이 자신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모습들을 많이 본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윤의 쏠림 현상도 마주한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이 어쩌면 새로이 변하는 현실에 비해, 현실에 대한 인식이 늦고 규제가 미비하여 만들어지는 무법지대가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은 아닌지 묻는다. 규제를 강화하자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싱겁지만, '규제 or 자율'이라는 프로파간다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 책의 결론이 어떤지 궁금한가? 그럼 사서 보자. 결론 말고도 볼만한 깨알같은 내용들이 많다.




다 쓰고 나니 모로코가 이겼다. 사상 최초 아프리카 팀의 월드컵 4강 진출이다. 호날두의 마지막 월드컵 경기는 패배로 끝났다. 기뻐하는 지예시와 울며 떠나는 호날두가 교차되는 화면을 보며 글을 쓴다. 읽기는 다 끝났으니, 책모임에서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지는 새벽이다. 


다음 책은 <나란 무엇인가> , <가족의 무게> - 조문희가 훌륭하게 정리해놔서 내가 중점적으로 본 부분들 위주로 정리를 해볼 생각 - 그리고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커밍 업 쇼트>를 정리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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