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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Dec 15.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221215

  <김씨 표류기>를 두 밤 걸쳐서 봤다. 보통 재담꾼이 아니고서는 만들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말로 유희하는 재능이 탁월했다. 화면을 구성하는 감각도 감탄스러웠다. 재밌지만 우습지 않았다. 두 주인공을 꽉 안아주고 싶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소망을 품게 됐다.



  '발견'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웠다. 미처 찾아내지 못했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물, 현상, 사실 따위를 찾아내는 것을 뜻하는 단어. 정재영과 려원, 두 배우가 연기하는 남녀는 세상에 이미 알려진 존재다. 한때 직장과 학교에 다녔고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문제는 둘이 자신을 아는 이들에게서 도망친다는 것이다. 정재영은 산더미 같은 빚이, 려원은 얼굴의 상처가 괴롭다. 어느 순간 그들은 자신을 감싼 과거에서 숨어버리기를 택한다. '김씨'라는 영화 속 둘의 흔한 명칭은 이들을 규정하지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감독은 상처받은 달팽이처럼 둘이 몸을 숨긴 이유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이들의 현재를 비추는 것으로 단도직입한다. 둘의 성격 차이가 영화를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정재영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으나 의도치 않게 살아남은 인물이다. 한강의 밤섬에 표류한 그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빚도 독촉도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리고 살고자 한다. 반면 려원은 조용한 소멸을 꿈꾼다(침상에서 그녀는 VCR의 내용을 삭제하는 장면을 보며 잠든다). 손목에 그어진 자상 같은 클리셰 한 컷조차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죽을 용기조차 발휘해본 적 없는 소심한 인물임을 알려주는 단서다.

  정재영이 표류한 한강의 밤섬과 려원이 스스로를 가둔 집 안의 작은 방은 밖과 고립의 장소라는 점에서 공통되다. 둘은 모두 다른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다만 정재영은 모든 것을 섬 바깥에 둔 채 온전히 섬사람으로 살고자 한다. 무인도에서 불을 지피고 밭을 일군다. HELP라는 첫 구조신호를 HELLO라고 바꾸는 것은 오롯이 그의 선택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가 짜파게티 봉지에서 발견하는 글자 '희망소비자가격'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희망'으로 변화한다.

  반면 려원은 밤에 달 사진을 찍는 것이 바깥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다. 그가 만드는 것은 자신의 자아-이상이 전부다. 그마저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서 구두, 옷, 얼굴을 베껴온다. 그녀와 정재영의 붕괴 원인이 달라서일 것이나, 무언가를 창조할 이유가 결락된 듯한 그녀의 인상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벌어오는 돈과 그들이 주는 밥만으로도 연명이 가능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방 바깥과 자신을 연결할 계기와 용기다. 별다른 도구 없이 낮은 섬에 거주하는 정재영과 달리 려원에게는 높은 집과 줌인이 가능한 고성능 카메라가 있다. 서로를 처음 발견하는 이가 정재영이 아닌 려원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둘의 내면을 그려낸 방식은 지극히 시각적이다. 려원은 3년 가량을 방 안에 숨어 지내며 부모님이 있는 시간에 한번도 문을 열어본 적이 없다. 그녀가 잠드는 곳은 방 속의 방이며, 유일하게 말을 거는 어머니와 소통하는 방식은 대면이나 대화가 아닌 문자 메시지다. 방은 쓰레기로 가득한데, 하나씩 정리하듯 파란 봉투로 묶여있다. 그곳에는 조명이 비치지 않는다. 그녀가 가장 많은 빛을 마주하는 순간은 컴퓨터 앞에서 미니홈피를 꾸밀 때다. 반면 정재영은 낮이고 밤이고 자신의 새 삶을 경작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의 섬에는 직접 만든 오리배 숙소, 페트병 신발, 화롯가가 차츰 자리를 차지한다.

  정재영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일순간 불어닥친 태풍이다. 또는 외부에서 찾아온 한강정화요원, 해병대 전우회다. 반면 려원의 세계는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HELLO',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로 이어진 펜팔 끝에서 'Who are you?'라는 질문을 마주한 직후다. 가장 아름다운 자신을 내보이고자 다른 사람의 사진을 찾던 그녀는 미니홈피 화면을 내려보다가 수많은 악플을 마주한다. 너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두려운 전언과 함께 그녀는 무너진다. 그녀가 마우스 휠을 내리는 '달그락 달그락' 소리는 한 존재가 마음의 안쪽으로 깊이 무너져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남몰래 바깥으로 나와 밤섬을 향해 와인병을 던지던 그녀가 멈칫거리고 주저할 때 조금 눈물이 났다. 스스로는 결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때 이미 변화의 분기점을 넘어선 것이다. 마음을 내어준 이 앞에서 이상적인 존재이고픈 열망과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은 욕망 사이에서 그녀는 흔들린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방문을 걸어 잠그는 그녀의 실루엣은 채도가 극히 낮다. 그녀가 정재영에게 두 번째 편지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가로등 불빛에 비친 꽃과 나비의 색감이 지극히 선명했던 것과 대비되는 순간이다. 이때까지 그녀는 한번도 밤시간 외에는 바깥 공기를 쐬어본 적이 없다.

  컬러 티비를 보던 사람이 흑백 영화의 시대로 회귀하기 어려운 것처럼, 태풍이 지난 날 그녀는 홀린듯 카메라를 들여다 본다. 마침 섬에서 쫓겨나는 정재영의 뒷모습을 마주한다. 추방의 짧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필 대낮이그녀는 문을 열지 못한다. 열지 못하다가 기어코 연다. 그때부터는 뒤돌아 보지 않는다. 그녀는 내내 내달린다.

  섬에서 쫓겨난 정재영은 63빌딩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한 채다. 그는 죽을 심산으로 보인다. 한 번은 살아날 수 있지만 두 번 살아갈 힘은 없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단단한 바닥으로 뛰어야 한다. 려원은 그가 탄 버스를 향해 뛰지만, 먼저 출발한 버스는 그녀보다 빠르다. 포기하고 눈물 흘리는 찰나, 민방위 훈련을 알리는 경보 소리가 들린다. 일년에 단 두 번, 그녀가 달이 아닌 낮시간의 거리를 촬영하는 시간이다. 경보가 울릴 때는 거리의 모든 것이 멈춘다는 것을 그녀는 안다. 그녀는 뛴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 정재영, 아니, 김씨에게 말한다. "마이 네임 이스 김정연. 후 아 유?"

  손을 마주잡은 두 사람의 미래는 알 수 없다. 감독은 최초의 악수를 비춘 뒤 출발한 버스의 모습을 먼 거리에서 잡는다. 버스 엔진 소리마저 멀어진다. 그리고 어둠. 남자 김씨의 이름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관객은 대신 그의 과거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오직 이름뿐, 오히려 알지 못하는 존재는 김정연 쪽이다. 김정연은 내내 그를 지켜봤지만, 그는 이제 막 김정연을 마주한 참이다. 둘은 괜찮을까?

  이해준 감독은 서로를 이해해야 위로할 수 있다는 명제를 믿지 않는 듯하다. 꼭 같지 않아도 희망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말을 도리어 지지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오래 전 김정연은 자장면을 갈구하는 김씨의 섬에 자장면을 배달보낸 적이 있다. 김씨는 거부하지만, 이상하게도 김정연은 실망하지 않는다. 그가 자장면을 거부한 이유가 그녀에게는 위안이 된다. '자장면은 내 희망이다.' 정말 오랜만에 희망이란 단어를 들었노라며 자장면을 먹는다. 자장면을 만들겠다며 밀과 옥수수를 기르는 김씨를 보며 엄마에게 옥수수 씨앗과 화분을 부탁한다. 김정연이 처음 대낮에 방문을 여는 순간이다. 추방으로 희망이 꺾인 김씨 앞에 설 때의 김정연은 자장면을 집어삼키고 옥수수 싹을 틔운 존재로 변모해 있다. 이제 희망이 깃든 쪽은 도리어 김정연 쪽이다.

   김정연의 얼굴에는 여전히 상처가 있고, 김씨의 빚은 1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를 알아볼 때, 그런 것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서로를 마주했다고 말해야 한다. '발견'이란 말예문을 더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문장이 될 것이다. 숱한 과거도 언제나 장애물일 수는 없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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