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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Dec 14. 2022

교양 프로그램 누가 봐 내가 봐

22.12.14. tvN,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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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바보상자라고는 하지만, 채널을 돌리다보면 지식 정보 프로그램들이 심심치 않게 잡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알쓸범잡>, <벌거벗은 세계사>, <예썰의 전당> 등 채널마다 '썰'로 지식을 풀어내는 프로그램들을 하나씩 꼽을 수 있을 정도니까. PD수첩이나 시사기획 창과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은 점차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데 - 참고로 SBS <스페셜>은 죽었다 살았다 하는 중이다 -, 그 빈자리를 '썰' 프로그램이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사람들은 TV를 통해서 뭔가 정보를 얻고 싶어는 한다. 단지 그 방식과 정도, 강도, 양이 좀 다른 것이지.


제목이 내 취향은 아니다... (재밌게 봐 놓고)


오랜만에 <벌거벗은 세계사>를 봤다. 사실 오늘 하는 줄도 몰랐는데 아내가 채널을 슥슥 돌리더니 찾아냈다. (나보다 더 교양 프로그램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다.) 글을 쓰면서 보다가, 보면서 글을 썼다. 그리고 결국 글을 접고 봤다. 예전같으면, 아이 뭐 이런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내용이 참 부정확한 부분도 많고 쉽게 이야기하느라 축약하고 뛰어넘는 부분들이 많아서 좀 그렇다, 라고 했을 거 같은데 지금은 오 세상에 이런 내용들이 있구나 하면서 본다. 더는 왕성하게 세상의 지식을 탐닉하지 않기 때문일까?


어려운 것은 어려운 대로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믿음을 아예 포기한 건 아니지만, 지금은 내 스스로가 그렇게 지식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 된 상황에서 그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라고 쉽게 내팽개치진 않게 되었다. 세상에 그렇게 만사에 모든 정보에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 그리고 자기가 허세를 부리고 싶은 만큼의 정보를 원한다. 남에게 자기가 아는 바를 전달하려면, 애초에 들을 때에도 쉽게 정리가 되어있는 편이 낫다. 썰이, 꽤 유용한 이유다.


듣고 동시에 말하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고 나면, 지식을 대량으로 때려붓기보다 잘 소화시킬 수 있도록 이야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하게 된다. 그 전엔 내가 그런데 동의를 못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랬겠지? 사람들이 가진 욕망의 크기, 방향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시하였던 업보가 이제 돌아오는 느낌이다. 말씀하시기 좋게 잘 썰어놓았습니다. 아, 그 남은 부분이 좀 있는데 그건 먹기 불편하니 버렸어요. 이 태도가 나쁜 장사치의 그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데 10년이 걸린 셈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지만, 그 사이 잊혀지면 안되는 이야기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상황은 빈번히 일어난다. 모르면 배워야 한다는 꼿꼿한 자세도 필요하지만, 제발 좀 이걸 한 번 봐 주셔야 한다 읍소하는 장사꾼의 태도도 필요하다. 예전에 어떤 선배는 내게 반 발짝만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걸 권했다.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보게 만들어야만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왜 그땐 미처 알지 못했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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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 이 떨어지고 있다고들 하는데 분명 여기에 방송이 기여한 나쁜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결정적인 변수라는 생각은 잘 안 든다. 방송이 거울이냐 전위냐, 묻는다면 거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물론 전위로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이끌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제한된 영역에 한정된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사람들이 꿈꾸는 무언가를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또 그런 태도가 계몽적이고 현학적이라면, 안 보면 그만인 시대다. 예전처럼 독점적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도 시청 이후에나 있는 게다.


게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사물은 너무도 많다. 뭐 하나에 오래 집중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시간이 길면 답답해한다. 오죽하면 영화 안 보고 영화 요약 유튜브 보고 끝내거나, 자막 나오는 대사들 빼고는 건너뛰고 보는 사람들이 사회적 현상으로 여겨지고 분석의 대상이 되겠는가. 길게 보면 다시 예전처럼 길고 진지한 영상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하겠지만, 짧게 보면 어쨌든 그 전에 살아 남는 게 먼저다. 분산된 관심의 세계 속에서 필사적인 적응을 병행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쉽지만, 다른 도리가 없으니...


그런 점에서 썰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절박하게 무언가 알리는 프로그램들에 경의를 보낸다. 이번주는 재즈와 힙합의 역사를, 다음주는 히잡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궁금했는데, 다음주에도 볼 이유가 생겼다. 사건과 사고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만,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사람들은 채널 위를 부유하다 이렇게 몸 뉘일 곳을 찾는다. 긴 표류에 지친 나는 이제 조금이라도 애쓰는 프로그램들이 귀하다. 제발 좀 살려주세요, 제가 보겠습니다. 제가 본다고 어르신들의 의사결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눈물이 나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여전히 사람들아, 이것 좀 봐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데, 과연 얼마만큼이 반발짝의 거리일지 고민하는 나날이다. <벌거벗은 세계사>는 반발짝에 가까워 보인다. <위대한 강의>도 반발짝 정도지만 회사가 사람들로부터 열발짝은 떨어져있는 기분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너무 가까운 자리에서 귀에 대고 말하고 있다. <PD수첩>과 <그것이 알고싶다>는 자기만의 방에 갇힌 기분이다. 대체 적당한 반발짝의 거리는 어디냐? 너는 잴 수 있냐? 글쎄다, 일단 재러 갈 수 있어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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