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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Dec 14. 2022

코로나 시대의 소설

221214

  카뮈의 <페스트>를 마저 읽었다. 외와 타루에게 경의를 표한다면 너무 평범한 감상인가. 상관 없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어떤 대목은 좋다는 말조차 못하겠다. 내 삶의 서문에 적어둔 문장 같다. 윤리적 감각과 사고의 키를 잡은 말들의 풍경이다. 그들이 실은 제사였음을 깨닫는다.



  인용으로 이뤄놓은 인생이라니. 구질구질한데, 어쩐지 외롭지 않다. 내가 존중하는 이는 성자도, 영웅도, 사랑에 빠진 존재도 아니다. 삶을 음미하되 집착하지 않으며, 끝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다. 시시한 것이 사람임을 모르지 않으나, 쉽게 토라지거나 섣불리 체념하지 않는 인간이다. 손으로 눌러가며 다시 읽어본다.


"당신이 지금 하려는 일을 나는 결코 막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하려는 일은 내가 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주고 싶어요.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194p


"어떤 행동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하다보면 결국은 간접적으로나마 악에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된다고 서술자는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훌륭한 행동들이 그토록 대단한 이유는 단지 보기 드물기 때문이며, 악의와 무관심이 인간 행동의 더 흔한 동인이라는 것을 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술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의 악은 거의 다 무지에서 나오며, 양식이 없다면 선의도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인간은 악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많이 알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미덕이나 악덕이라고 부른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 158p


"인간의 구원은 저에게는 너무 거창한 단어입니다. 그렇게까지 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관심 갖는 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 255~256p


  뒤로 갈수록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웠다. 전개가 급 늘어져서는 아니었다. 페스트를 마주한 오랑의 풍경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예전에는 소설 속 묘사를 따라 상상하면 됐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 사이 코로나19를 겪어버린 것이다.

  카뮈가 그려낸 페스트 이후의 오랑은 실제 같았다. 실제와 유사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아는 현실이 자꾸 떠올랐다는 뜻이다. '환기됐다'는 말로는 모자라다. 신문기사를 통해 보고, 때로는 직접 취재로 마주했던 현실 속 장면이 머리를 때렸다. 관념이지만 물리적이었다.


"그는 페스트가 진행되는 추이를 지켜보면서, 라디오에서 사망자 수를 일주일에 몇백 명이라는 식으로 보도하지 않고 하루에 92명, 107명, 120명이라는 식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시점이 그 병의 전환점이었다고 지적했다. '신문과 당국은 페스트에 관해 아주 교활하게 장난을 치고 있다. 910명보다는 130명이 훨씬 적은 수이기 때문에 그들은 페스트를 몇 점 차로 이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 137p


"모든 일은 최대한 신속하고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방식 때문에 적어도 초기에는 가족들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훼손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페스트가 유행하는 기간에는 그런 감정들을 고려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효율성이 우선시되었다. 게다가 초기에는 품위있게 땅에 묻히고 싶다는 욕망이 생각 이상으로 널리 퍼져 있어서 시민들이 그런 처리 방식에 괴로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식량 보급 문제가 어려워지자 주민들의 관심은 다행히 좀 더 즉각적인 문제로 기울었다. ... 관이 더욱 귀해지고, 수의를 만들 천과 묘지도 부족해졌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역시 효율성 때문이지만, 장례를 합동으로 치르고 필요한 경우 병원과 묘지를 오가는 횟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 가족들을 호출해 장부에 서명하게 했는데, 바로 이 점이 예컨대 사람과 개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차이점이었다. 인간의 죽음은 항상 관리가 가능했다." - 206~208p


"시간이 지나면서 식량 보급 문제가 악화됨에 따라 또다른 걱정거리들이 생겨났다. 거기에 투기까지 끼어들어, 부족한 생활필수품들이 일반 시장에서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팔렸다. 그 결과, 가난한 가정은 무척 괴로운 상황에 놓인 반면, 부유한 가정은 부족한 것이 거의 없었다. 페스트가 가져온 공평성이 효과를 발휘해 시민들 사이에서 평등이 강화될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본래 갖고 있던 이기심 때문에 페스트는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불의의 감정만 심화시키고 나았다. 물론 죽음이라는 완전무결한 평등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런 평등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276p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 사람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페스트 앞에서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자칫 방심한 순간에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전염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외의 것들,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건강, 청렴결백함, 순결함 등은 의지의 소산이에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될 의지 말이에요." - 295p


  지금까지 소설 앞에 적어뒀던 모든 형용사는 옛 것이 됐다. <페스트>는 아픈 소설이다.


1. 카뮈가 몸소 겪은 현실은 전쟁이지 페스트가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이렇게 썼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래, 문학적 재능의 산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시신 처리 같은 행정의 문제를 알기 위해선 경험이 필요하다. 카뮈가 태어난 것이 1913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페스트>를 발표한 것이 1947년이다. 우리 나이로 서른 다섯. 나와 동갑이다. 내가 이렇게 쓸 수 있나?식사가 끝나도 소화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시간의 밀도'가 달랐다고 할 수밖에.


덧2. 이런 문장은 통째로 외워뒀다가 언젠가 취재 현장에서 베껴쓰고 싶다. 운동장에 차려진 수용소를 묘사하면서 '터치라인'이란 단어를 쓰다니. 뭐야 당신.

"실제로 타루의 수첩에는 랑베르와 함께 시립 운동장에 설치된 수용소를 방문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 마침내 그들은 운동장에 들어섰다 관중석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운동장은 수백 개의 붉은 천막으로 뒤덮여 있었고, 천막 안에 있는 침구와 보따리 같은 것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관중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덥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수용자들이 몸을 피할 수 있었따. 그러나 해가 지면 천막으로 돌아가야 했다. 관중석 아래에는 샤워실이 새로 설치되었고, 예전의 선수용 탈의실은 사무실과 의무실로 개조돼 있었다. 수용자 대부분은 관중석에 모여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터치라인 근처에서 서성겨렸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천막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관중석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주저앉아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277~2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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