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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Dec 16. 2022

'사회' 없는 시대의 연애

22.12.16. 제니퍼 M. 실바, <커밍 업 쇼트>


<PD저널>에 보내기 위해 다듬기 전에, 끝까지 썼던 초고를 갈무리해 둔다. 저널은 분량 문제도 있고 해서 몇몇 부분들을 뺐는데, 브런치는 아무래도 독자도 좀 다르고 읽는 환경도 다를 거 같아 남겨뒀다. 책 내용보다는 책과 삶이 잠깐 스치던 순간에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 둔 느낌이지만, 글의 완성도와 별개로 쓰면서 상쾌했다. 요새는 그거면 됐다는 생각도 한다. 최근 글쓰기가 정말 무서웠거든.


이번엔 묘하게, 뭔가 덜 써서 아쉽다는 느낌은 없다. 문장이 가벼워 날아가는데, 오히려 아쉽지 않은 게 아이러니하다. 내년까지 쓸 수 있다면 - 그런 기회를 주신다면 - 내년엔 좀 많이 편안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용 고민은 치열하게 하되 문장은 뽐내지 않는, 그런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저자 제니퍼 M.실바의 2019년 책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 - 소외된 노동계급의 목소리에서 정치를 상상하기>가 번역되어 나왔는데, 이 책도 같이 볼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보고 여기에 정리해 둬야지. 얼마나 달라졌고, 얼마나 여전한지,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아직 있는지 말이다.




매주 수요일은 바쁘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골때리는 그녀들>이 시작한다. 바삐 뛰어다니며 최선을 다하는 언니들에 집중하다보면, 아내가 슬쩍 리모콘을 든다. 살짝 섭섭하지만 동의의 고갯짓을 하고 나면 아내의 손가락이 바삐 움직인다. <나는 솔로>의 시간은 그렇게 온다. 깎아놓은 감이든, 구워놓은 오징어든 입에 넣고 우물대다보면 사랑의 정글을 헤쳐나가는 이들의 분투가 시작된다.


<짝>의 조연출 생활도 짧게 했었지만, 연애 버라이어티에 여전히 큰 흥미가 없다. 연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오늘날, 조난자처럼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기 일쑤다. 그런 파도에 몸을 맡기고 서핑하는 아내에게 뭐가 그렇게 매력적인지 궁금해 물어본 적이 있다. 아내의 긴 대답을 간단히 줄이면, 현실의 지루함과 비루함이 거세된 공간에서 짧은 시간 압축적으로 사랑에 몰두하니, 연애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재미를 한 번에 느낄 수 있지 않냐는 거였다.


아내는 <하트시그널>과 같은 동떨어진 세상에서 벌어지는 연애보단, 아는 사람의 연애를 보는듯한 프로그램이 좋다고 했다. 판타지인 건 마찬가지지만, 적당한 현실감이 있어야 더 몰입할 수 있다나. 가명을 쓰지만, 그들의 경제적 배경이 여전히 선택에 미치는 영향을 지우지 않는 프로그램이 그래서 오래 가는 건가? 결혼과 연애가 지금처럼 '리스크'로 여겨지는 때도 없지 싶은데, 연애가 주제인 프로그램들은 넘쳐나는 아이러니를 설명할 실마리가 아내의 말 속에 있는 듯했다.


예전에 보았던 제니퍼 M. 실바의 <커밍 업 쇼트>에는 '불안한 친밀감들'이라는 장이 있다. 실바가 말하길,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사회적 안전망을 파괴한 탓에 장기적으로 삶을 전망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오늘날,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는 일은 청년 세대에게 무모한 일처럼 느껴진다. 왜? 안정된 경제적 기반 없이 누군가에게 헌신했다가 파국을 맞는 사람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불완전 고용, 장애, 질병, 약물,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이 무너졌던 경험도 그들을 고립시킨다.


하지만 사람이란 편히 몸을 누일 공간과 마음을 내려 놓을 사람을 필요로 하니, 모순에 시달린다. 결혼을 통해 안정적 삶을 꾸리고 싶다는 욕망과, 불안한 결혼이 혼돈을 몰고 오리라는 두려움 사이에서 청년들은 헤멘다. 분명 핵가족 사회가 되면서 예전에 비해 남녀 관계도 평등해졌고, 가족 구성원이 져야 할 의무가 가벼워지면서 자유를 얻었지만, 반대급부로 더 쉽게 깨지고 더 쉽게 위험해진다. 가족 바깥의 세계도 함께 무너졌으므로. 어른들은 '결혼'을 어른이 되었다는 지표로 삼았지만, 청년들은 이제 그 위험을 감수하길 두려워한다.


연애 버라이어티의 범람은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가랑이가 찢어지는 젊은 세대의 불안한 마음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가 아닐까? 친밀감에 따른 리스크를 감당할 수는 없으나 대리 만족은 하고 싶은 이들이 TV로 연애를 간접 경험하기를 더 선호하면서, 방송국과 OTT가 그 판타지에 부응한 것인지도 모른다. 연애, 결혼, 취직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서 앞 세대의 어른들과 똑같은 경로를 밟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진 노동 계급 청년들이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고 자존감을 획득하기 위해 무엇을 택하고 있는지 추적하는 그녀의 책을 조금 더 따라가 보면, 대리 만족을 원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을 사회의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던 다양한 제도들이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해체되고, 그 미비한 제도들로부터 배신당한 경험은 젊은 청년들로 하여금 자기가 무엇에 기대야 할 지 모르게 만들었다. 믿을 것은 자기 자신이자, 가장 위험한 것도 자기 자신이다. 자기의 발목을 붙잡는 가족을 떨쳐내고 독립하는 데 성공하려면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했다. 소위 '자기계발'만이 유일한 믿을 구석이다보니, 연대는 빌붙는 행위의자 부도덕한 행위처럼 느껴진다. 가족과 공동체는 기댈 곳이 아니라, 이제 나를 괴롭히는 굴레일 뿐이다. 


"미국 산업의 소멸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정책의 부상이 초래한 불안전 및 불확실의 정치경제"가 사람들의 인생 경로를 불확실한 상태로 내몰았다. 사회로부터의 '해방'은 자유를 가져다 주었지만, 동시에 그렇게 풀려난 사람들이 과거의 연결과 제약을 갈망하는 허무함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성장한 노동 계급 남녀에게 이 불확실성은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을 것이다. 우리 없는 나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고투하는 영웅에 자신을 투사하는 시대가 왔다는 게 실바의 생각이다. 물론 그 결과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세계를 바꾸기보다, 그 세계에서 최대한 잘 '적응'하는 것 외에 상상하기를 멈추었지만.


한병철이 '프로젝트 주체'를 말하며 이야기하는 바도 비슷했다. 자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계발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성공시키는 순환 과정에 뛰어드는 게 프로젝트 주체이자 오늘날 대중의 보편적 모습이라는 건데, 이 무한한 긍정은 사실 자기 혐오로 쉽게 전락한다. 뭐든 가능한데 무엇도 못한다면 우울증은 필연이지 않을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조이와 에블린을 괴롭히는 무력감을 떠올려보라. 모든 평행 우주에서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나면,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비루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든지 아니면 파괴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 보인다.


물론 <커밍 업 쇼트>와 <에에올>은 한병철의 분석보다는 다른 현실을 꿈꿀 가능성에 힘을 주고 있긴 하다. 에블린은 그 무력한 우울감을 벗어나는 선택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최악의 상태인 지금의 삶을 살아가기로 택하면서. 실바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압도적인 자기 계발의 명령이 꼭 옳은 것은 아니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군가에겐 남아 있다며.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지는 상황에서, 과거로 단순히 회귀하자는 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 새로운 연대의 희미한 가능성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판타지를 낳는 세계의 변화가 없다면, 판타지를 못마땅해 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연애 버라이어티가 문제가 아니라, 연애 버라이어티가 비혼의 시대에 인기를 끄는 현실이 무엇을 비추고 있는지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의미가 있겠지. 신자유주의가 현실의 연애를 죽인 자리에, 연애 버라이어티가 피어난다면 우리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자리에 얼마나 많은 핏자국들이 남아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다 사라지고 나면, 이제 누가 방송을 봐 주나.




아래는 오늘 게시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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