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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Dec 24. 2022

국경 어딘가 당신 자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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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소설가 김연수가 산문집 <여행할 권리>에서 꺼낸 아버지 이야기에 혼란스러웠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나고야 출생으로, '대동아전쟁'이 끝난 뒤 한국에 들어왔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열다섯살 남짓, 귀국선에서 판잣집이 가득한 부산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단다. '잘못 왔구나.' 아버지가 일본 노래를 듣고 일본 책을 읽는 모습을 김연수는 기억한다. 그리고 말한다. "자신의 인생이 언제부터인가 잘못됐다고 믿는 남자의 아들이 되는 일은 좀 피곤하다. 그의 리얼리티는 국경선 너머에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 글을 쓰느냐면 바로 그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의 리얼리티는 이 현실에서 약간 비껴서 있는 셈이다. - 47p



  <여행할 권리>는 '국경'을 탐색하는 책이다. 김연수는 열 편 남짓 에세이 내내 국경의 존재를 더듬고 의미를 묻는다. '국가의 경계마다 그어진 선'이란 말로 단정하는 이에겐 불필요한 작업일 게다. 신자와 불신자, 내셔널리스트와 아나키스트가 그 점에선 다르지 않다. 민족국가라는 근대 체계를 전제하면서도 넘어서려는 이들만이 질문을 한다.

  김연수의 특이한 점은 경계가 아니라 국경이라는 단어를 고집한다는 데 있다. 자아를 한계지우는 경계가 국경만은 아닐 것이고 때로 자아 그 자체가 지평이기도 할 것이나 그는 끝내 국경이라는 말을 데려온다. 모든 경계의 근원에는 국경이 있다는 듯이. 그가 만난 할머니는 마리화나를 처음 피운 뒤 '모든 것이 변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외국으로 나갔기 때문에 마리화나를 태울 수 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소설가가 되고 나서부터였겠지만, 나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좋아하게 됐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은 내게 되려 자기 자신이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 100p


  그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국경과 마주하고 있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섰거나, 넘어서지 못했거나, 넘어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국경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이들도 있다. 실은 그가 그들의 국경을 알아본 것이다.

  눈에 띈 국경을 넘어서는 것이 김연수의 문학적 야심이다. 국경을 넘어서지 못한 이들, 국경을 넘어섰으나 여전히 국경으로 인해 고달픈 이들을 알아보고자 그는 애쓴다.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 자신은 알지라도 남들은 모를 수 있기 때문이고, 모르는 이들의 세계가 온존한다면 어떤 삶이 가리워진 채 사위기 때문이다. 그렇게 삶에 폭력이, 문학에 한계가 깃든다.


  그러나 이제 경제력이 발달하고, 문화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한국계 작가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중인지 보여주고자 할 때, 아스트리드 같은 작가를 한국으로 불러들인다. 이건 정말,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아스트리드가 한국 쪽의 초청을 받아들인 건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게 바로 '피의 부름'이겠지. 그래서 '피의 부름'은 언제나 좀 잔인하다. - 210~211p


  진지한 문학이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낯설게 만들어 자아를 끊임없이 재해석하게 만드는데, 국내용 문학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자신들이 아는 세계에 맞게 자아를 만들어내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고 나면 경계선 바깥은 모두 타자가 된다. 국내용 문학이 하는 일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 169p


  지난 백년 동안 수없이 많은 동양인 이민자들이 그렇게 젖은 눈으로 금문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금문교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의 목소리가 숨어있다. 귀를 기울이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문학은 그런 목소리를 외부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그 존재가 그 목소리로 증명된다. 반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들, 즉 입술이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본디부터 정치적이다. 금문교를 바라보면서 나는 문학이란 그들을 대신해 소리를 내어줌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금문교가 있는 한, 누군가는 이민자들의 언어로 그들의 삶을 드러낼 것이다. ... 그렇다면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한국에는 이제 더이상 말을 빼앗긴 존재가 없다는 뜻일까? ... 혹시 한국에서 자꾸만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 198~201p


  때로 그 폭력의 방식은 한 눈에 알기 어렵도록 복잡하다.


  만보산 사건이라는 게 있다. 1931년 7월1일, 중국 지린셩 챵츈의 만보산에서 조선인 이주민들이 개척한 수로와 제방을 둘러싸고 중국 농민들과 분쟁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 조선인들과 중국 농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여기에 일본 영사관 경찰이 끼어들었다. 결국 사건은 부상자 몇명이 나오는 선에서 수습됐는데, 이 사건이 국내로 전해지면서 인천, 경성, 원산, 평양 등지에서 수천명의 중국인들을 테러하는 폭력사태를 낳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본의 기사 날조와 폭력 조장이 있었다. /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저항적이건 공격적이건 모든 민족주의는 '국내용 사상'이고 '지역적 사상'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야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중국인 가게를 공격하면서 기염을 토할 수 있겠지만, 국경만 넘어가면 상당히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를 친일파와 동일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실태조사랍시고 만주지역을 살펴보고 돌아간 사람들이 만주지역 조선인들의 권익을 주장하면 할수록 실제 만주지역에서 사는 조선인들의 권익은 침해당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 215p


  김연수는 같은 관점에서 기존의 문학을 평가한다. 이광수, 김사량, 그리고 이상에 대한 그의 평가가 특히 흥미로웠다.


  이 책(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을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한반도 남쪽 지역에서만 살아온 터라 이광수의 이런 국제적 감각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게 국제적 감각이 아니라 국내적 감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광수 문학의 지리적 지평은 처음에는 일본 본토와 조선 정도였다가 일본군부의 확전 결의에 따라 만주를 거쳐 동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으로까지 넓어졌다. 이광수에게는 이게 모두 국내로 인식됐다. 하지만 결국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면서 이광수가 내면화한 이 '국내'는 허망한 신기루로 밝혀졌다. 그러니 당시 '국내'의 지평을 담은 이광수의 시나 소설이 이제는 '친일'의 범주에 묶이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겠다." - 167~168p


  나는 김사량이 민족어를 찾아나섰다는 걸 쉽게 수긍하지 못하겠다. 봉쇄선 백오십리를 뚫고 찾아간 해방구에서 김사량이 발견한 한국어는 중학시절의 영어나 일본어처럼 낯선 언어였다. 그건 독립국가를 지향하는 언어였다. 이태준이 하야시 후사오에게 문의할 때의 '조선어'가 아니었다. 그 언어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언어였다. "총을 던지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왜놈이 아니다"라는 건 김사량에게 과거의 언어일 수 없었다. / 작가인 내게 김사량의 탈출이 지극히 문학적으로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사량은 국경을 넘어 알 수 없는 미래의 공간으로 탈출했다. 그 새로운 미래는 그가 한번도 가지지 못한 언어로 구성됐다. 작가라면 이게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지 알 것이다. 작가가 목숨을 건다는 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 182p


  이상은 정신적으로 국경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의 유해가 누워 있던 토오꾜오제국대학 부속병원 물료과 병실이란 국경을 넘어보지 못한 이상이 가본 가장 먼 지방이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문학 천년이 잿더미에 돌아갈 지상 최종의 걸작이 있었다. 그러니 거기를 '접경'이라고 할 수밖에. ... 국경을 넘어보지 못한 이상은 오히려 국경보다 더한 경계를 넘어갔는데, 국경을 넘어 19일이나 아메리카를 둘러보고 온 박인환은 결국 무엇도 넘어서지 못했다. - 265~266p


  마지막으로 작가로서 김연수의 태도를 소개한다. 그는 인식만으로 글을 쓰지 않는데, 국경을 머릿속 생각만으로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본에 실망한 이상이 바다 건너 유럽에 도달한 곳이 '토오꾜오'의 병상이라 해도, 유럽을 꿈꾸기 위해선 일단은 일본에 와야했던 것처럼. '진지한' 기자에게도 해당하는 미션이 아닐까.


  "함북 경흥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부모를 따라 길림성 화룡현 상천평으로 이주했다... 1937년 10월12일 화천현 납자산에서 제8군 제1사 내부의 배반자에게 살했당했다." ... 이런 문장들을 읽는데 숨이 턱 막혔다. 이건 내가 도저히 쓸 수 없는 소설이 아닌가. 내가 어찌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내부의 배반자에게 살해당하거나 소작농의 아들로 내어나 간첩으로 오인받아서 동지들에게 총살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쓸 수 있단 말인가. 1970년 지방소도시 빵집에서 태어나 별다른 굴곡 없이 인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도저히 그들의 삶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날, 나는 더이상 복사해서 노트에다가 짧은 생애를 붙이는 일을 그만뒀다. 멍하니 가을햇살을 보면서 나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방법이 하나 있다면, 최소한 그들이 죽은 옌뼨에서 그 소설을 쓰는 일. 그 정도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소설이었다. - 129~130p


  김연수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역, 휴게소, 공항이란다. 지금이 아닌 어딘가를 희망하는 공간이기에. 그곳에서 그는 관찰하고 쓴다. 그러다 불쑥 떠난다. 자신도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서, 다른 삶의 구도자를 섬세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그 예민한 존재야말로 김연수가 희구하는 진정한 자신일 것이다. 나는 국경만이 그 기준일 수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 나아가야 나아진다는 말은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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