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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Dec 23. 2022

SIDE A / SIDE B

22.12.23. 뉴진스, <Ditto>


Ditto SIDE A : https://www.youtube.com/watch?v=pSUydWEqKwE


Ditto SIDE B : https://www.youtube.com/watch?v=V37TaRdVU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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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tto'는 재현이다. 그것은 문장의 첫 줄에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건네야, 나는 이 단어를 쓸 수 있다. 그러므로 Ditto는 시작부터, 재현일 수밖에 없다. 재현인 한에서 아무리 비슷해도 진짜가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똑같이 대꾸할 수 있기 때문에 동질감과 안정감을 느낀다면, 누군가는 완전히 같을 수 없고 오로지 '대답'으로서 가능하기 때문에 절망과 좌절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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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가 SIDE A/B 두 개다. A/B에는 서로 다른 노래들이 담겨 있다. 주로 A에 타이틀 곡이 담겨 있고, B에는 싱글 컷이 안 된 곡들이 담겼다. A를 담기 위해 테이프가 감기는 길이만큼, B의 길이도 정해진다. A는 주도한다면, B는 이끌려간다. 하지만 종종 SIDE B에서 터지는 곡들도 있다. 그것은 의도가 아닌 경우가 많다. 하나의 앨범이지만 두 면은 이렇게 구성의 논리가 완전히 다르다. A/B도 그런 게 아닐까? A는 의도를 드러낸다면, B는 그 의도를 빗나가는 구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복이지만, 같진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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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가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해석 놀이에 빠졌다. 가장 유력한 해석은 팬과 아이돌의 관계에 대한 헌정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촬영지가 대구라는 점에서 2003년의 참사를 떠올리곤 했다. 둘다 그럭저럭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단순하게 보려면 단순하게 볼 수 있지만, 복잡하게 보려면 한 없이 복잡하게 볼 수 있는 텍스트다. 보고자 하는 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니, 마치 여러 번 공략 가능한 게임처럼 매력이 있다. 게다가 중학생부터 사회인까지 모두 참여할 수 있으려면 꽤 보편적인 상징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작품의 수준을 떨어뜨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상 전체에 흐르는 감정은 '상실감'인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에 따라서 영상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 혹은 친구같은 구체적인 인물이라면 영상 속에 배치된 소품들의 역사적 배경을 따져 현실의 참조점을 찾아낼 것이다. 그래서 그게 누구인지를 찾게 될 것이다. 만약 사람이 아니라 어떤 마음의 상태나 추억 같은 것이라면 뉴진스로 재현되는 환상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던 90-00년대 '하이틴'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라서,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한 번 시선에 걸러진 환상을 재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해석은 자유다. 몇몇 상징들을 즐겁게 엮어낼 수 있는 좋은 그물을 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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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 않은 두 개'가 핵심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A에는 있지만 B에는 없는 것, 반대로 B에는 있지만 A에는 없는 것들이 뭔가를 말해주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장면들은 두 개의 영상에서 반복된다. 영상의 톤도 동일하고, 배경이나 등장인물도 비슷하다. 그럼에도 굳이 나눠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시차'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이지 않았을까? A를 한 번 경험하게 하고, B를 조금이나마 늦은 시간에 경험하게 하여 A와 B를 ditto의 관계로 만들어내는 시차.


A에는 16:9의 화면이 있지만 B에는 없다. 16:9의 화면은 유튜브 채널의 기본 화면비라, 좌우나 상하에 레터박스가 없다. 전체화면으로 본다면 매우 매끄러운 표면이 될 것이다. 반대로 6mm 캠코더로 찍은 화면은 4:3이라 좌우에 레터박스가 있고 노이즈가 심하다. 현실의 '재현'임을 드러내는 표면의 거침이 있다. 2.35:1로 찍힌 화면들도 그렇다. 영화 화면비인데, 상하에 레터박스가 생긴다. 유튜브를 통해 공개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터박스는 의도적 장치가 된다. 실제로 같은 장면이고 같은 카메라인데도 A에서는 16:9 비율로 확대해 넣은 장면들이 있다.


레터박스 혹은 노이즈는 이것이 '편집'된 영상임을 시청자에게 인지시킨다. 반대로 매끄러운 표면은 그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기 어렵다. 잘려나간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은 어떨까? 16:9의 화면비로 보이는 영상은 그것이 어떤 것으로 찍었든 환상이고, 그 외의 모든 장면들은 그 환상에 균열을 내고 있는 실재의 흔적들이라고. A에는 16:9로 제작된 다양한 환상들이 가득하지만, B에는 그런 장면이 하나도 없다. A와 B가 같은 장면을 보여줄 때에도 A에는 16:9로, B에는 4:3이나 2.35:1로 보여준다. 편집의 실수가 아니라면, 그것은 B에 더 이상 환상이 없음을 드러내거나 B가 환상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음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시차'가 필요하다.


재현의 실패, 환상의 구축에 실패하는 것. 혹은 재현 자체가 애초에 실패라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이 느끼는 상실감이 지배적인 정서다. 물론 그것은 내가, 이미 '어른'이 되기 위해서 실패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일테다. 혹은, 이 영화의 시선이 그렇게 실패를 받아들인 어른의 시선이기 때문인지도. 어릴 적 잃어버린, 윤곽도 희미한 '빙봉'을 다시금 그리려는 시도처럼 느껴질 때면 나는 내가 종종섬뜩해진다. 영상이 그런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답할 순 없어도, 내가 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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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질문들.


16:9로 나오는 장면들 가운데에는 수돗가에서 반희수와 남학생이 눈을 마주치는 장면이다. 이것도 자신이 원하는 매끄러운 환상일까? 반희수가 유일하게 카메라를 거치지 않고 남학생의 얼굴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그래서 눈이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장면이 '환상'의 영역이라면, 사실 주인공은 단 한번도 남학생과 눈을 직접 마주친 적이 없을 수도 있다. 뉴진스=환상/남학생=현실이라는 구도는 그래서 모호하다. 오히려 뉴진스 멤버들은 카메라를 통해서 마주하기도 하지만 한 화면 안에서 카메라 없이 동시에 잡히기도 한다. 화면엔 그러므로 진실이 없다. 매끄러운 환상과, 그것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얼핏 드러나는 균열만 있을 뿐이다. 


카메라를 깨트린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카메라를 통해서 만들어내려 했던 환상의 완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닐까? 게다가 카메라 없이도 한 남자에 대한 환상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면, 더 이상 불필요했을 수도 있지 않나. 이제 뭔가를 보고 상상하는 데 눈만 있어도 되는 것이지. 어쩌면 그것이 개안일 수도 있다. 이제 카메라로 보던 세계는 과거의 추억이 되고, 나는 내 눈으로 세상을 보며 보다 손쉽게 환상을 구축한다. 그것이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 않을까?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고 먼지 쌓인 VHS 비디오로만 뉴진스를 만나는 반희수도 이제는 어른이 된 것일테고.


그리고 사슴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환영은 확실한데 사람들마다 다르게 말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패트로누스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과거나 추억이라고 하는데 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설원에서 마주하는 사슴과 복도에서 마주하는 사슴은 16:9와 2.35:1 사이의 거리만큼 다를 수도 있다. 고정된 의미로 해석하기에는 애초에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해석의 빈 구멍들을 이곳에 걸어둘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지점들이 몇 군데 있기 때문에 , 해석은 시도할 수 있지만 언제나 잔여가 남는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의 의미망을 짤 수 있는 거란 생각도 든다. 그래서 즐거운 거고, 나도 그런 잔여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꿰메 본다. 그러다보면 재미있는 해석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어쨌든 즐거운 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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