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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Jan 24. 2023

시카리오 시바리오

230124

  

  설 연휴엔 집에서 미드 <지정생존자>와 영화 <시카리오>를 봤다. 지정생존자는 다 보진 못했고 시즌 1 일부만. 예전에 조금 봤던 것 같은데 초반에 멈췄던 모양. 6~7회쯤 가선 기시감조차 없었다. 어우 이걸 왜 보다 말았지. 긴장감 때문인지 동생과 팝콘 한 봉지를 절반 이상 먹었다. 시카고 클래식(치즈+카라멜 믹스) 팝콘인데, 코스트코에서 산 것이니 양이 얼마나 많냐고. 21회 분량시즌 1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언제 다 보나 싶더니만, 이러다 시즌 2 보게 생겼습니다.



  시카리오는 컷 하나하나 생생했다. 한번 본 게 전부인데 왜 이렇지? 인위적인 질문이다. 어릴 적 별스럽지 않은 순간도 세세히 기억나는 반면 나이 들어서 본 장면은 중요한 것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익숙해서라고 하지 않나. 예나 지금이나 낯설고 새로운 영화다. 초반엔 내용 파악도 잘 안되는데 박력에 홀려서 쭉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가 끝에 가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되는 거다.



  일전에 내가 왓챠피디아에 쓴 영화평을 찾아 보니 "배트맨이 하비덴트를 필요로 했던 이유"더라. 별로다. 그렇게 적은 이유는 알겠지만 불명료하다.

  유사성은 있다. 공간의 특성이다. 다크나이트의 배경이 고담이라는 '답 없는 도시'이듯, 맷(조쉬 브롤린)과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는 멕시코의 산물이다. 두 지역 모두에서 법은 무력하고, 법의 집행자는 부패해 범죄자와 구분하기 어렵다.

   차이점은? 일단 시점. 배트맨이 1인칭 주인공인 다크나이트와 달리 시카리오는 알레한드로가 주인공인 영화다. 시점은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의 것이지만 그는 장소를 소개하고 주인공의 성격을 드러내는 역할에 그친다. 이 차이는 꽤 중요한데, 차곡차곡 변신 서사를 쌓아올린 배트맨과 달리 시카리오에서 케이트는 알레한드로가 뭘 하려는 건지, 왜 그러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내내 휩쓸려 다닌다.

  캐릭터도 딴판이다. 배트맨과 알레한드로는 질서를 희구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같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길 바라지만, 범죄의 힘과 법의 사각지대에 절망한 적이 있다. 법 바깥에서의 폭력적 행위가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믿는 이들이다. 다른 건 대응 방식이다. 배트맨은 부패를 솎아내 법 집행자의 힘을 키우고 범죄자의 세력은 약하게 만들어 균형을 잡고자 한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자신은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여긴다('사라지는 매개자'?). 사람의 생명, 고담 시민의 안정처럼 그에겐 질서를 통해 지키려는  높은 가치가 존재한다.

  반면 알레한드로가 세우려는 질서는 범죄자들 간의 질서다. 그가 보는 멕시코-콜롬비아 지역의 마약 조직과 전세계적 마약 소비자는 근절이 불가능한 존재다. 질서 이외에 그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영화 속에선 드러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했던 아내는 목이 잘렸고 딸은 염산 통에 던져졌다. 오히려 그는 구원을 가진 범죄조직의 수장 파우스토 알라르콘을 죽이기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인물처럼 보인다. 가깝다면 배트맨보다는 하비덴트 쪽이고, 히어로물보다는 하드보일드다.

  서사는 오히려 범죄자들 쪽에 주어진다. 부패 경찰 실비오는 영화 속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과 내내 교감하고, 파우스토는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한다. 반면 케이트는 이혼했고, 알레한드로는 가족을 잃었다는 서술이 전부다. 가족 관계라는 측면에서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여지는 범죄자 쪽이 더 크다. 그런데 그들은 악당이고... 죽어야 해... 파우스토야 최종 목표니 그렇다 치고, 실비오는 정말 허무하게 죽는다. 그냥 보스 잡으러 가는 길에 밟고 지나간 수준. 이럴 거면 왜 세번씩이나 아들과 얘기하는 장면을 넣어줬나. 카메라가 죽은 실비오를 오래도록 비추는 건, '이게 다 의도적'이라는 표현이다.



  음영 대비를 적극 활용한 촬영 눈에 띈다 싶더니 촬영감독이 로저 디킨스. 코엔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등 작품을 찍은 인물이다. 땅굴 소탕 작전에 앞선 해질녘 사막 촬영은 거의 예술 사진급인데, 긴장감과 혼란을 함께 주려는 선택이라 생각하니 무릎 탁. 땅굴 안 촬영에 야시경이나 컴퓨터 화면(?)을 써 실재감을 준 것도 좋다.

  뭣보다 부감숏이 많은 게 인상깊은데, 다큐멘터리스러운 느낌을 주려는 것 같아서. 이게 그저 영화가 아니고 벗어날 수 없는 '이 공간'의 현실이라고 얘기하는 거다. 유독 롱숏이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 같은데, 주 배경이 사막이니 가능하고 도시인 고담이 배경이라면 힘든 선택일 것.

  위 사진은 처음 멕시코에서 범죄자와의 총격전을 본 케이트가 '뭐하는 짓이냐'고 맷에게 따지는 장면이다. 논쟁인데도 두 인물을 각각 클로즈업해 번갈아 등장시키는 일반적인 기법을 쓰지 않았다. 카메라는 둘을 멀리서 잡는다. 저들의 다툼도 가까운 국경지대와 먼 사막의 풍경 속으로 수렴될 뿐이라는 듯.

  "You will not survive here.You are not a wolf. And this is land of wolves now." 카리오 인생 X나, 시발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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