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W Aug 17. 2022

주류에 맞서는 용기

김훈, <하얼빈>을 읽고


서점을 지나다가 우연히 김훈 작가의 새 소설 <하얼빈>을 발견했다. 팬심을 자랑하듯 훑어보지도 않고 구매를 했다. 시작부터 그의 강렬한 문장은 나를 잡아당겼다.

사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으로 등장하는 사냥꾼 안중근, 그는 30살 즈음의 젊은 남자로서 소설 속에 살아있었다. 이미 나는 그 나이를 넘어섰다. 나이를 비교해가며 소설을 읽으니 그의 진중함과 용기에 비교하자면 나는 생각 없는 형이 되어버렸다. 나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안중근은 내 주변에 있는 30살 동생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또 내가 30살이었을 때 어떤 고민을 하고 살았는지 돌이켜 보기도 했다.(음… 당시에 나는 유튜브 공략을 보면서 플레이스테이션을 했다….) 그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내 또래 인물로 상상하고 안중근을 보니 그 감동이 더 커졌다. 감동은 시대 주류에 맞서는 안중근의 용기에서 나왔다.


1909년 조선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보자. 하늘 같은 대한제국 황제와 황실이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비굴하기 짝이 없다. 일본은 청나라를 밀어내고 한반도를 장악했다. 당시 대세는 일본이고 일본과 친한 사람이 잘 나가는 사람이다. 배운 사람이라면 일본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그 주변은 말 그대로 센 놈이 약한 놈을 먹는 야만의 논리가 반박할 수 없는 주류였을 것이다. 이 논리로 한반도를 끌어가는 자가 이토 히로부미였다. 안중근은 여기서 이토 히로부미의 작용을 멈추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쐈다. 당연시되는 힘의 논리를 벗어나 동양평화를 위한 자신의 주장을 말하기 위해 총을 쐈다.


안중근은 위인이니까, 훌륭한 사람이니까 쉽게 용기를 낼 수 있는 걸까. 안중근은 지금 나보다 어린 30살이었다. 그는 천주교인으로서, 가장으로서 고뇌했다.


당시 주류 논리에 저항하는 안중근이란 인물을 현시대로 데려오면 의미가 새롭다.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2022년으로 돌아오자. 지금 우리 시대에서 주류가 되는 논리는 여전히 약육강식이고 자본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경쟁, 자본, 시장은 이 시대의 매직 키워드다.

중고등학생에게 공부란 대입을 위한 경쟁이고 등급은 현실이다. 그 안에서 교육과 성장을 이야기하면 ‘이상주의자의 헛소리’라는 조롱을 듣기 십상이다. 학부모, 교사 심지어 학생도 교육과 성장이 좋은 얘기인 것은 알겠으나 등급을 올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을 마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청년에게도 경쟁은 계속된다. 높은 연봉, 1등 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최고의 가치다. 그 안에서 자신의 적성이나 직업의 보람을 이야기하면 ‘한가한 소리나 하는 비현실 주의자’라는 눈초리를 받는다.

성인으로 자리를 잡은 뒤에도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주식, 코인, 부동산을 멀리 하면 가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 시장의 특성은 상대의 손실이 나의 계층 사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월급을 모아서 내 집 마련은 불가능하고 먹고 먹히는 잔인한 시장 질서에서 이기는 것이 우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의 가치를 운운하면 ‘정신 승리하는 선비’라는 비아냥을 들을 것이다.

‘좋은 소리’와 ‘현실’의 대결에서 늘 현실이 압승한다. 압승하는 현실이 주류가 된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100여 년 전보다 더욱 강력해졌고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졌다. 100년 전 안중근이 주장한 동양평화론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상의 옳고 그름을 넘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논리에 정면으로 맞선 용기에 감동하는 것이다.


2022년에 안중근 같은 청년이 자본주의와 시장질서에 총을 겨누면 우리는 이에 감동할까 아니면 조롱할까.


상상을 해보자. 지금은 1909년 일본의 자리를 ‘미국’으로 치환해도 어색함이 없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미국 앞에서 작아진다. 대세는 미국이고 미국과 친한 사람이 잘 나가는 사람이다. 배운 사람이라면 영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미국이 강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리나라에 어떤 불이익을 주더라도 결국 현실이라는 강력한 힘 앞에서 우리는 100년 전 모습과 다르지 않게 눈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 같은 청년이 미국과 패권주의 또는 시장경제 질서에 저항하며 총을 쏜다면 숨죽이고 있던 국민들은 감동할까, 조롱할까?(역시 50:50일까)


장담컨대 나는 안중근처럼 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주의자, 비현실 주의자, 정신 승리하는 선비라는 조롱을 감당하기 어렵다. 세계의 평화나 조국을 위해 주류에 맞설 용기가 없다. 차라리 공부를 더 해서 등급을 올리고, 높은 연봉을 위해 인턴을 하나라도 더하며, 경매 공부를 해서 저렴하게 나오는 아파트를 찾고 있을 공산이 크다.

소시민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안중근에게 표를 주고 지지해주는 것뿐이다. 내가 그 길을 가지 못한다고 해서 나와 달리 용기 있는 자를 조롱하거나 비난하지는 말자. 나 대신 ‘현실’보다 ‘좋은 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닐까.


P.S. 30살의 나는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블러드본]을 하면서 왕을 잡는 희열을 느끼고 있었기에 할 말이 없다(현타가 세게 왔다).



이전 21화 로봇 이야기는 슬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